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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노동력을 불렀더니 사람이 왔네”

입력
2017.07.06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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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국경을 넘어 경계를 넘어-독일로 간 한국 간호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 기획에 참여한 이희영 교수의 안내로 전시관을 찾았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여성들의 사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1966년 해외개발공사 모집으로 처음 선발되어 독일 쾰른 공항에 도착한 이들인데, 한껏 부풀게 단장한 머리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설렘과 기대를 안고 독일의 여러 공항에 내린 여성들은 해외공사에서 발행한 명찰 위에 새로 부여 받은 번호로 호명되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우리는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분류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나와 함께 열일곱 명을 실은 이층 버스는 인적이 드문 베를린 거리를 한없이 달려갔다.”(최영숙)

3년의 단기취업 계약으로 독일 땅을 밟은 간호 여성들의 이주는 1973년 독일이 고용을 중단한 후에도 한동안 더 지속되었고 공식적으로는 1977년 마지막 이주가 이루어진다(계약 연장, 학업, 결혼 등으로 이 무렵까지 남은 1만1,000여 명의 여성들이 현지 한인 1세대를 이루게 된다). 전시대에 놓여 있는 낡은 독일어 사전과 <서독 파견 간호원을 위한 독일어>라는 책은 그이들이 초기에 겪었을 어려움을 짐작하게 했다. 주로 간병 업무에 투입되어 거구의 독일인들을 상대해야 했던 곤경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다달이 일정한 액수를 기입해 놓은 송금명세서, 한국에서 가져갔거나 그곳에서의 결혼에 맞추어 가족이 보내준 한복 등은 머나먼 이국 땅에서 그이들을 지탱한 가족이라는 유대, 조국에 대한 상념을 착잡하고 뜨겁게 비추어주고 있었다.

나란히 붙은 두 장의 사진이 이상하게 눈길을 사로잡았다. 하나는 겨울 외투를 입은 두 노년의 여성이 손을 잡고 공원에 서 있는 모습이었고, 그 옆의 사진은 바로 그 두 사람이 거실 소파 양쪽에 편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행복해 보였다. 옆에 있던 이희영 교수에게 눈을 돌리니, “맞아요”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 아래 글이 있었다. “김인선 씨와 이수현 씨는 나치에 의해 국가 폭력의 피해를 입었던 동성애자들을 위한 기념비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베를린은 이런 것이 있을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지금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60,ㆍ70년대 한국에서라면 그이들의 성 정체성은 평생 숨겨야 할 고통의 낙인이었을 테다. 그러고 보면 당시 한국 여성들의 취업 이주는 경제적 이유에 의해서만 선택된 것은 아니었다. 개발독재의 정치 사회적 억압이 팽배한 때였고, 특히 여성들의 자기실현 기회가 극히 제한적이었던 상황에서 독일은 기회와 가능성의 땅일 수 있었다. 전후 부흥기의 서독은 여러 측면에서 한국보다 훨씬 열린 사회였으며, 한국의 간호 여성들이 특히 많이 진출한 서베를린의 경우 당시 유럽 전역을 휩쓸던 68혁명의 중요한 진원지이기도 했다. 전시실 한가운데 일기장, 편지, 독일어 교습 노트 등과 함께 놓여 있던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와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도 그이들을 이끈 정신적 좌표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되었다.

1973년 독일 정부가 사실상의 강제송환 정책을 펴자 ‘서로 돕는 여성회’ 중심으로 서명운동에 돌입하여 체류권 투쟁에서 승리를 이끌어내는 과정은 그이들의 존재적 성장과 사회적 각성을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도록에는 그이들이 그때 만든 구호가 보인다. “노동력을 불렀더니 사람이 왔네.” “얼마 동안이나 더 사람들이 물건처럼 이리저리 보내져야 하는가?” 이후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는 투쟁을 포함해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고비마다 이들이 보탠 성원과 헌신을 우리는 안다. 이 교수는 이번 촛불항쟁 때 이들이 흘린 감격의 눈물을 전했다. 그 눈물의 순간은 멀고도 긴 여정의 한 쉼표였을까.

정홍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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