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왜곡된 성의식이 사회적인 문제로 급부상하고 있다.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관실 행정관은 “임신한 선생님들도 섹시했다”는 발언으로 도마에 올라 거센 사퇴 요구에 직면했다. 지난달 대전의 한 중학교에선 10여명의 남학생들이 여교사 수업시간에 수 차례 집단 자위를 한 사실이 적발되면서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
여교사에 대한 모욕과 성적대상화는 최근 불거진 일은 아니다. 젊은 여교사를 짖궃은 말로 당황시키거나 울린 일화는 많은 남성들 사이에서 학창시절 추억담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피해자인 여교사는 피해사실조차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기 일쑤다. 오히려 교육자로서의 자질을 의심받는다는 부정적인 시각에 갇히기 십상이다.
교육 당국의 태도도 심각하다. 대전 남중생 집단자위 사건에 대전 시교육청은 ‘교사를 대상으로 한 행위가 아닌, 사춘기 학생의 개별일탈행동’이라는 언론 해명자료로 사건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는 비판에 빠지기도 했다. (기사보기☞ ‘대전 중학생 집단음란행위’를 보는 엇갈린 ‘시선’)
그렇다면 일선 여교사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난해 6월 초등교사들로 출범한 ‘초등성평등연구회’(이하 연구회)는 매월 정기모임을 갖고 수업시간에 사용할 성평등 교재를 개발하고 있다. 여교사를 둘러싼 사회적 편견이나 성적대상화 문제도 이들의 관심사다. (기사보기☞
여교사도 섹스한다, 그게 어떻단 말인가) 지난 1일 서울 강남의 한 스터디룸에서 이 연구회의 솔리(가명∙ 27), 애리(가명∙ 26) 교사를 만나 일선 현장에서의 경험담을 들어봤다.
탁 행정관의 ‘임신한 여선생님이 섹시’발언? “유아적”
이들은 먼저 탁 행정관의 ‘여선생님’ 발언은 기본적인 젠더의식의 처참함과 함께 유아적인 속성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했다.
애리 교사는 “초등 5학년 즈음 되면 남학생들이 제 앞에서 ‘섹스’라는 단어를 말하는데, 그것이 성적 흥분이라기보다는 ‘나는 이런 말까지도 선생님 앞에서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다’며 남학생들 사이에서 서열을 잡고 뽐내는 데 이용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솔리 교사는 “남성들이 모여 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낄낄거리고, 무용담으로 삼는 구조 자체가 ‘남자가 되기 위한 관문’으로 여겨지는데, 굳이 여교사를 소재로 삼은 탁 행정관의 경우도 ‘나는 임신한 여교사까지도 성적대상화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고 꼬집었다.
“남학생의 여교사 성희롱은 교권 추락이 아닌 젠더 권력의 문제”
솔리와 애리 교사는 중학교에서 발생한 남학생 집단 자위 사건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고 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초등 교실에서도 남학생이 여교사를 상대로 자행되고 있는 성희롱은 상습적으로 발생한다는 게 이들의 얘기다. 이들은 특히 담임이 아닌 교과를 전담하는 초임 여교사들이 많이 겪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애리 교사는 초임 시절 6학년 과학 전담 교사로 수업을 들어갔다가 한 남학생으로부터 음담패설과 외모평가 등의 성희롱을 당했던 경험을 털어놨다. 애리 교사는 “그 반에서 싸움을 잘하는 ‘일진’ 남학생은 저에게 ‘앙 기모찌’, 혹은 ‘야메떼, 야메떼’(일본 야동에서 주로 나오는 여자 배우의 대사)라고 말하고 도망가거나, 치마를 입고 가면 ‘선생님 치마 X나 짧네요’, 화장을 하고 가면 ‘선생님 화떡’, 화장을 안하고 가면 ‘선생님 존못’ 등의 이야기를 계속했다”고 말했다.
애리 교사는 “수업시간에 반의 우두머리 격인 ‘일진’이 책을 던지며 반항해서 제대로 책을 주워오도록 수 십 차례 반복시켜 ‘만만해 보이는 선생이 우리반에서 제일 센 애를 제압할 수 있다’는걸 보여준 후에야 더 이상 대들지 않았다”며 “아이들은 체육 전담 교사였던 동료 남교사에겐 절대 대들지 못했다. 초등학교에서조차 ‘강약약강’을 느낄 거라곤 교대생 시절엔 생각도 못했다”고 토로했다.
남중생들의 집단자위 사건처럼 교사가 성적대상화의 피해자가 되는 문제를 ‘교권추락’의 문제로 보는 시각도 경계했다. 솔리 교사는 “이런 사건은 오로지 가해자 남학생과 피해자 여교사의 등식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에 젠더 권력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집단자위라는 점, 그리고 한 번이 아니라는 점, 사후에 남학생들이 ‘너네 선생님 우리가 놀려줬다’라고 말한 점 등 여성을 모욕함으로써 남성성을 과시하는 집단 문화는 결과적으로 탁 행정관 발언의 본질과 직결된다”고 말했다.
‘성희롱 피해자’? ‘사랑으로 감싸줘야 할 선생님?’… ‘교권보호’는 먼 길
피해자인 교사들은 사실 제대로 피해사실을 인정받기 힘든 게 현실이다. 학생들 간 문제가 발생하면 열리는 ‘학교폭력자치위원회’처럼 교사가 피해자일 경우 열리는 ‘교권보호위원회’가 있지만, 교사는 학생 처벌 보단 계도하는 존재란 인식 때문에 실제 열리기가 쉽지 않다.
솔리 교사는 “교권보호위원회가 꼭 학생을 처벌하기 위해 여는 게 아니라 공식적으로 이 사안의 중대성을 모두가 인식할 수 있도록 공식절차를 따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측면도 있는데 ‘선생님이 아이를 사랑으로 감싸주려고 해야지, 따지려고 들면 안 된다’는 인식이 너무 강하다”고 말했다.
‘통솔력 없는 교사’란 낙인도 모든 문제를 교사 스스로 해결해야만 하도록 만드는 족쇄라고 했다. 애리 교사는 “남학생에게 성희롱 발언을 들었을 때 선뜻 다른 선생님에게 조언을 요청하지 못한 것도 ‘내 수업이 얼마나 우스워 보일까’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라고 말했다.
초등 성평등 교육, 학년별 다른 접근 필요
교육 현장에서 성편견을 해소하는 교육을 이어가는 이들은 학년마다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저학년의 경우 남녀 성역할 고정관념이 더 심한 반면 기본적인 성평등 교육을 통해 빠른 시간 안에 교정된다는 것이다.
반면 추상적ㆍ비판적 사고가 가능한 고학년을 대상으로 한 성평등 교육은 좀 더 복잡해진다. 애리 교사는 “남학생들은 ‘맨박스(man box)’라고 하는 남성성에 갇혀서 고통 받지만 아이들은 그걸 모른다. 가령 ‘남자가 계집애처럼 울어?’ 이런 이야기를 듣고 여성스럽게 행동하는 것을 열등한 것으로 여기는 여성혐오가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이 남녀차별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직장 내 유리천장, 남녀 임금격차 등을 이야기해봤자 반발이 나올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교사들은 학생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문제를 발견하도록 유도한다. 애리 교사는 “아이들에게 억울한 것을 이야기해보라고 한 후,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 문제인가를 짚어보게 한다. 가령 여드름이 고민인 남학생이 화장으로 감추고 싶은데 ‘남자가 무슨 화장이야’라는 말을 듣는다면, 그것도 여성성을 열등하게 보기 때문에 나오는 말은 아닌지 생각하게 만들 때 좀 더 빨리 받아들인다”고 설명했다.
솔리 교사는 “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금방 바뀌는 것은 그만큼 아이들도 성편견에 의해 불편하고, 고통 받았기 때문일 것”이라며 “남녀를 구별짓는 교육이 아닌, 가정과 학교에서 하나하나의 개성을 봐 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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