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면을 자랑하듯 제멋대로 구겨진 자주색의 생활 한복에 앞코에 때가 묻은 헌 운동화. 가수 이효리는 지난달 30일 서울 여의도 KBS 별관에서 열린 예능프로그램 ‘해피투게더3’ 녹화장에 배낭을 메고 허름한 차림으로 나타났다. 대도시로 잠깐 일 보러 산에서 내려온 도인이 따로 없다. 이효리는 화려함을 뽐내는 스타들의 출근길 풍경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바꿨다. 뼛속 깊이 대중적인 연예인은 아웃사이더, 주변인의 방식으로 존재를 드러낸다. 주류와 비주류 정서의 공존, ‘가요계 섹시퀸’ 이효리가 사는 법이다.
‘팜므파탈’과 ‘생태여성주의’… 이효리의 두 얼굴
이효리는 4일 6집 ‘블랙’ 공개를 앞두고 숱한 화제를 뿌리고 있다. 손석희 JTBC 사장도 초대(‘뉴스룸’)했고, ‘국민 MC’ 유재석은 그를 만나러 제주(MBC ‘무한도전’)까지 내려갔다. 보도와 예능이란, 성격이 180도 다른 프로그램에서 다양하게 소비되고 있다. 이효리가 지닌 캐릭터의 독특함 덕이 크다. 1998년 그룹 핑클로 데뷔한 이효리 만한 ‘반전스타’도 드물다. 이효리는 ‘악녀’ 이미지가 강했다. 솔로 데뷔곡 ‘텐미닛’과 ‘유고걸’의 성공으로 가요계를 대표하는 여가수가 된 이효리는 “술을 하도 여기저기서 얻어 먹고 다녀 유기견이라 불렸다”고 방송인 김제동이 방송에서 폭로할 만큼, 누구보다 자유분방하게 20대를 살았다. 이효리는 2008년 연말 음악 시상식에서 8년 후배인 그룹 빅뱅 멤버 탑과 파격적인 키스 무대를 선보여 가요계를 발칵 뒤집기도 한 ‘도발의 아이콘’이었다.
이런 이효리가 180도 달라진 건 2010년부터다. 4집 ‘에이치 로직’에 실린 7곡이 표절 의혹에 휘말려 큰 홍역을 치르고 난 뒤다. 이효리의 관심은 자아성찰로 옮겨졌다. 공존과 환경 문제 등에 집중하며 ‘새 옷’을 입었다. 오른쪽 팔 뒤에 ‘봄에는 사뿐히 걸어라, 어머니 같은 지구가 임신 중이니’란 뜻의 영문 ‘Walk lightly in the spring, Mother earth is pregnant’ 란 문신을 새긴 그는 제주 집에서 유기농으로 콩을 재배해 팔고, 동물 보호에 앞장섰다. 채식주의자인 이효리는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상업 광고에는 출연하지 않는다. ’팜므파탈’은 무대 밖에서 생명의 화두를 던지며 제 영역을 넓혔다. 2015년엔 마힌드라 쌍용자동차 회장에게 해고자 복직을 청원하는 등 여러 사회적 현안에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악녀’를 자처하며 주는 웃음과 ‘에코 페미니즘’(생태여성주의)을 통해 던지는 삶에 대한 윤리적 화두. 이 극과 극 요소의 공존이 이효리에 대한 호기심을 끊임없이 불러 일으키고 있다.
‘여성 아이돌’ 신화 깨기에서 위안부 화두로
대형 연예기획사(DSP엔테테인먼트)에서 만들어진 핑클 활동을 끝낸 뒤 이효리는 2003년 솔로 데뷔 후 주체적으로 가수의 길을 걸었다. 이효리는 솔로 앨범 타이틀곡을 모두 직접 선택했고, 앨범 콘셉트도 손수 짰다. 연습생 신분 한 달 만에 핑클로 데뷔한 이효리는 자신이 지닌 목소리 표현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이효리는 자체 프로듀싱, 즉 기획을 택했다. 자신의 앨범에 자기 색을 더 진하게 녹이기 위해 3집 ‘잇츠 효리시’ 부터 신인 작곡가의 곡을 적극적으로 받아 들였다. 무명 작곡가에게 곡을 받을 땐 그의 이력을 묻지 않았다. 이효리의 히트곡 ‘치티치티뱅뱅’을 작곡한 라이언전(본명 전세원)은 “그때 난 완전 신인이었는데 이효리가 작곡가의 브랜드를 전혀 따지지 않더라”며 “이효리가 곡을 듣고 직접 노랫말을 쓴 뒤 무대 콘셉트를 짰는데, 프로듀서의 기질이 돋보였다”고 말했다.
관습을 무너뜨리는 이효리의 도전은 2013년 낸 5집 ‘모노크롬’부터 본격화된다. 특히 여성주의 화두가 두드러진다. 앨범 수록곡 ‘미스코리아’에서 표준화된 아름다움을 꼬집은 그는 6집 수록곡 ‘변하지 않는 건’에서 자연스럽게 늙는 것을 예찬하며 여성의 몸에 대한 신화를 깬다.
‘전직 요정’의 사회를 바라보는 시야는 더 넓어졌다. 지난달 28일 먼저 공개된 ‘서울’에서 대도시의 삶을 연민하는 이효리는 다른 수록곡 ‘다이아몬드’에선 위안부 할머니의 슬픔을 위로한다. MBC ‘무한도전’에서 요가하는 모습을 보여준 이효리는 다른 여가수와 달리 요가를 다이어트가 아닌 “정신 수련”의 과정으로 어필한다. 지혜원 대중문화평론가는 “이효리는 아이돌 이후에도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어, 누구의 아내이자 엄마가 아닌 주체적으로 소비되는 보기 드문 여성 연예인”이라고 봤다.
모순의 성장통 그대로… ‘포스트 아이돌’ 이효리
이효리는 2집과 4집이 표절 의혹에 휘말리며 가수로서 생명력을 잃을 뻔 했다. 이효리는 예능프로그램으로 위기를 돌파했다. SBS ‘패밀리가 떴다’에서 민낯을 보여준 이효리는 이후 ‘골든12’과 ‘매직아이’ 등에서 힘을 빼고 자신의 삶에 대한 소신을 들려주며 시청자와의 거리를 좁혔다. 2013년 밴드 롤러코스터 출신 기타리스트 이상순과 결혼 뒤 사생활의 문을 꽁꽁 걸어 잠궜던 이효리는 최근 JTBC 예능프로그램 ‘효리네 민박’을 통해 자신의 집을 공개하며 다시 시청자에 손을 내밀었다. KBS ‘해피투게더-쟁반노래방’에 이어 ‘효리네 민박’에서도 이효리와 함께 한 윤현준 JTBC 예능국 책임프로듀서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솔직함”과 “나이가 들면서 오히려 살이 붙은 인간적 매력”을 방송인 이효리의 장점으로 꼽았다.
한우홍보대사가 끝나자 마자 채식주의를 선언해 비판을 사기도 한 이효리는 자신의 모순과 성장통을 가감 없이 보여주며 자신의 틀을 깬다. 이효리는 “유명하지만 조용히 살고 싶고, 조용히 살고 싶지만 잊혀지기 싫다”는 모순적 바람을 지적한 손 사장에 “가능한 것만 꿈꾸며 살 순 없지 않나요?”라고 되물었다. 이루지 못할 환상을 꿈꾸는 이효리는 고된 현실을 벗어나려는 이들이 꿈꾸는 탈출구다. 김교석 방송평론가는 “이효리의 느리게 사는 삶은 현실과는 동떨어져도 많은 이들이 바라는 삶”이라며 “지금 문화적 화두와도 잘 맞아떨어져 ‘이효리 현상’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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