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연극이 끝났다. 극의 제목은 ‘옹고집전’이었다. 배우들이 워낙 맛깔나게 연기한 덕에 관객들이 공연 내내 웃음보를 터뜨렸다. 배우들이 일렬로 서서 객석을 향해 인사를 한 뒤 퇴장하려는 찰나 ‘엄마’ 하고 부르는 소리가 울렸다. 오십대 남자였다. 그는 무대에 뛰어올라와 머리가 희끗한 배우 한 명을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아이처럼 눈시울을 붉히며 울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어머니와 아들 사이었다. 아들은 “몇 달 전 아버지가 떠나신 후 어머니가 홀홀 적적하게 지낼 줄 알았는데 복지관 연극 수업에 참여해 무대를 준비하면서 꿋꿋하게 슬픔을 이겨냈다는 생각에 마음이 벅차올랐다”고 고백했다.
“엄마, 나 왔어요!” “할머니!”
또 다른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금세 무대가 어르신 배우들의 아들과 딸, 손자 손녀로 그득해졌다.
이 장면을 보고 눈시울을 붉히는 사람이 있었다. 어르신들을 지도한 연극배우 최병남(39)씨였다. 그는 막을 올리기 두 달 전부터 복지관 직원과 함께 출연하는 어르신들의 자녀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일종의 ‘서프라이즈 파티’를 준비한 셈이었다. 그러나 하나 같이 “시간이 안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당일 날 모두 오셨어요. 어르신들에게 알리지도 않구요. 자녀들이 저는 물론이고 부모님들까지 속인 거죠. 하나같이 500명이 넘는 관객 속에 숨어서 연기하는 부모님을 지켜봤대요. 연극이 끝 난 후에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요. 무대에서는 어르신들이, 객석에서는 당신들의 자녀들이 연극을 하고 있었던 셈이지요.”
- 한 달에 경차로 5,000킬로미터씩 달린 이유
그에게 연극 강의는 부업이다. 10년 전쯤부터 강의를 시작했다. 부르는 데가 많아서 구미에서 출발해 김천, 안동을 거쳐 포항에서 마지막 수업을 하고 돌아온 날도 있었다. 한 달에 5,000킬로미터를 넘게 뛰자 정비소 직원이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지방에는 무대가 적어요. 1년에 두 편 정도 무대에 올라요. 나머지는 모두 연극을 가르치고 보급하는 일에 에너지를 쏟았죠. 처음엔 그저 부업이었지만 나중에는 본업만큼 중요한 일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무엇보다 연기에 도움이 됐다. 올해 ‘경북연극제’와 ‘제2회 대한민국연극제’에 올린 ‘그냥 갈순 없잖아’에서 노인 역을 맡았다. 10년 넘게 어르신들을 지도하면서 체득한 노인 특유의 몸짓과 말투가 자연스럽게 배어 나왔다. 그러나 관객들이 몇 번이나 눈을 씻고 “진짜 노인 아닌가”하고 의심한 건 단순히 몸 연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연극은 상대를 이해하는 가장 적극적인 과정입니다. 어르신들과 함께 연극 활동하면서 그분들의 내면을 들여다볼 기회가 많았어요. 세월이 주는 회환이나 깊은 깨달음들이 제 마음으로 스며들지 않았을까 싶네요. 연극이 가지는 소통의 힘이죠.”
연극은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보는 것이다. 최 배우는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가장 깊은 병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않는 것, 또 이해하지 않으려는 것”이라면서 “이 병을 치유하는데 연극만한 약이 없다”고 말했다.
“역할극을 해보면 대번에 알죠. 학생들을 상대로 수업을 할 때 부모님에게 불만이 많은 아이에게 엄마 역할을 맡기면 극이 끝나기도 전에 눈물을 쏟기 일쑤에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엄마의 마음이 느껴지는 거거든요.”
그는 ‘일년일극주의자’다. “일 년에 연극 무대 한번씩 서 보기”라는 뜻이다. 꼭 연극일 필요는 없다. 연극이든 합창이든 밴드든 상관없다. 다만 혼자 서는 무대는 제외다. “다 함께 하는 것, 서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장르”에 한해서 꼭 한해 한번은 무대 경험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이다. 학교에서 연극을 정규 교과로 편성하는 것도 그가 가진 꿈 중의 하나다.
“제가 연극배우라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보면 역시 연극 같은 예술 활동이 답인 것 같아요. 마음을 나누고 서로 도와야 완성되는 예술 작품이 아니면 경쟁과 이기심으로 지친 마음을 치유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연극예찬론자에다 누구든 한번이라도 연극을 보면 최고의 연기파 배우로 손꼽는 배우 성장했지만 연극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는 한편의 콩트 같다. 외로워서 부른 노래 덕분에 연극을 시작했다고 했다.
열아홉 살에 상주에서 구미로 내려와 대기업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시절이었다. 가족과 처음으로 떨어져 생활한 탓에 외로움을 달래려고 종종 기숙사 지하에 있던 텅 빈 헬스장에 내려가 노래를 불렀다. 어느 날 벽이 탕, 탕 울렸다. 옆방에서 벽을 두드린 거였다.
“바짝 긴장했죠. 시끄럽다고 항의하는 줄 알았거든요. 밖으로 나가니까 남자 두 명이 서 있었어요. 극단 사람들이었죠. 기숙사 지하실에 연습실을 꾸리고 있었거든요.”
그들이 준비하고 있던 연극이 ‘사의 찬미’였다. “연극 한번 해보실래요?”하는 질문에 홀린 것처럼 “예” 하고는 지하실에서 선보인 노래 실력을 갈고 닦아 연극 무대에 데뷔했다. 그것도 주연으로.
“3년쯤 지나고 나니까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내가 배우 해도 되는 건가 하고요.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거죠, 하하!”
- 연극 100편을 만들고 싶은 이유
그 두려움은 지금도 마음 한켠에 초병처럼 두 눈을 부릅뜨고 서 있다. 배우라는 직업이 어울리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그는 배우란 한없이 자유분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엉뚱하고 기발하고, 무엇보다 자유롭고 도전적이어야 하는데 본인은 그렇지 못하다고 했다.
“가족들이 지금도 그래요. 네가 배우할 줄은 몰랐다고. 넌 누가 봐도 ‘비서타입’인데 어떻게 자유롭기 그지없는 배우를 하고 있느냐고요.”
그래도 배우를 그만둘 생각은 없다. 일 년에 두 편 남짓 오르는 무대지만 그때마다 ‘이게 바로 내 일’이라는 확신이 들고, 연극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바꾸어놓는 모습을 보면서 불쑥 불쑥 사명감을 느낀다. 앞으로의 계획도 온통 연극에 관련된 것들뿐이다. 연극 100편을 만들어 보고 싶다고 했다.
“제목을 ‘고백’ 시리즈로 정했어요. 영어 ‘고(go)’와 숫자 ‘100(백)’을 합쳐서 ‘고백(go100)’요. 무대가 허락하고 관객들이 공감해준다면 100편까지 만들고 싶어 ‘go100’이라고 한 거예요.”
고백 시리즈의 테마는 소통이다. 혹은 ‘기억하는 것’이다. 연극을 보면서 어머니나 친구, 동생, 혹은 동료의 얼굴을 떠올리게 하고 싶다는 이야기다. “공연장을 빠져나가면서 생각난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얼굴 한번 보자, 하는 말쯤 건넨다면 성공으로 생각할 것”이라고 했다.
“저와 저를 둘러싼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연극과 가까워진다면, 연극으로 소통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진다면 그보다 좋을 순 없겠단 생각을 늘 해요. 더 많은 사람들이 무대에 그려지는 세상을 보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또 주변 사람들을 보다 깊이 이해했으면 합니다. 제가 그런 것처럼요.”
김광원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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