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화건설 이정화 차장은 올 4~5월 32일에 걸쳐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을 걸었다. 이 기간 800㎞를 완주하기 위해서 매일 25㎞가량 걸어야 했다. 느린 걸음 탓에 오전 6시에 출발해 8~10시간을 걸은 뒤 오후 3~4시쯤 순례자 숙소에 도착하는 강행군이었다. 순례자의 길에 있는 72곳 마을에서 도장을 찍어 순례 증명서를 받는데 성공한 그는 “직장인이라는 생각을 잊고, 새로운 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삶의 활력을 얻었다”고 말했다.
#한화첨단소재 김모 차장은 다음달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제주 바닷가에 가족들과 지낼 집을 한 달간 빌렸다. 김 차장은 “꼭 무엇을 해야겠다는 거창한 목표는 없다”며 “아이들과 제주도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도서관을 찾아 책도 읽으며 시간을 보낼 예정”이라고 말했다.
직장인들에겐 꿈과 같은 1개월 휴가가 이들에게 가능했던 건 한화그룹의 파격적인 휴가 제도 덕분이다. 한화그룹은 올해부터 과장 이상 승진자(과장, 차장, 부장, 상무보)에게 안식월 휴가를 주고 있다. 새로 부여된 직책과 역할에 대해 준비하고, 재충전할 시간을 갖자는 취지다.
길어야 1주일, 그 이상 쉬려면 사표 쓸 각오를 해야 했던 직장인들의 휴가 관행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2주에서 많게는 한 달까지 쉬도록 하는 기업들이 등장하고 있다.
CJ그룹은 올 5월 기업문화 혁신 방안 중 하나로, 근속 5년 차마다 4주간 휴가를 낼 수 있도록 했다. 근속 연수에 따라 50만~500만원의 휴가비도 지급한다. 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한 달간 ‘자녀 입학 돌봄 휴가’를 낼 수 있다. 부모의 보살핌이 가장 필요한 시기라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카카오는 근무한 지 3년이 지날 때마다 30일의 안식 휴가를 준다. 안식휴가는 유급이며, 휴가비 200만원을 별도로 지급한다. 최소 2주 전 조직장과 협의해 본인이 원하는 기간에 쉴 수 있다. 카카오의 한 직원은 “휴가비까지 주기 때문에 안 가면 손해라는 분위기”라며 “1년 내내 팀에서 1, 2명씩은 휴가 중”이라고 말했다.
휴가 신청할 때마다 상사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직원들을 위해 임원, 팀장 등 관리자들이 의무적으로 장기 휴가를 가도록 하는 기업도 등장했다. 이랜드그룹은 지난달 임원들에게 ‘2주 휴가’ 일정을 확정하도록 했다. 임원과 팀장들이 먼저 휴가 일정을 정해, 직원들이 눈치 보지 않고 휴가 계획을 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LG유플러스도 팀장과 지점장 등은 8~10일의 장기 휴가를 의무적으로 가야 한다. 이를 쪼개서 사용하려면 담당 임원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물론 여름 휴가를 포기해야 하는 기업들도 있다. 지난달 모바일 게임 ‘리니지M’을 출시한 엔씨소프트의 관련 부서 직원들은 휴가 대신 프로젝트에 집중하는 분위기다. 신작 게임은 출시 직후 서비스 관리 등 실시간 대응이 필요한데 이 기간이 3~6개월에 달하기 때문이다. 최근 인공지능 플랫폼 B2B 사업을 시작한 대기업 S사도 직원들의 휴가를 무기한 연기했다.
업종 특성상 공장 가동을 중단할 수 없거나 인력난에 시달리는 중소기업들도 장기 휴가는 먼 나라 이야기다. 시멘트 업계의 경우 채굴한 석회석 덩어리를 구워내는 소성로를 연 365일 가동해야 해 더운 여름에도 근무 인력을 유지해야 한다. 경기 안산시에서 기계 부품을 만드는 중소기업 A사 대표는 “일손이 부족해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해 공장을 가동하는 형편이라 여름 휴가는 꿈도 꿀 수 없다”고 말했다.
재계 관계자는 “직원들이 충분히 휴식을 취해야 업무 성과도 높아진다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장기휴가 등 기업 문화를 혁신적으로 바꾸는 노력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한준규 기자 manbok@hankookilbo.com
민재용 기자 insight@hankookilbo.com
이서희 기자 sh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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