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클린턴 대북정책 한 몸 이뤄
노무현, 부시 달래기 ‘이라크 파병’ 결정
MB, 쇠고기 수입협상 타결 뒤 촛불 역풍
朴-오바마 글로벌 파트너 격상
윤창중 사건으로 세계적 망신

역대 정권들의 첫 한미정상회담은 하나 같이 미국의 신뢰를 얻기 위한 외교 총력전의 양상을 띠어왔다.
보수성향 정권과 진보성향 정권을 막론하고 미국의 지지 없이 대북정책을 펴기는 현실적인 한계가 따랐기 때문이다. 또 한미관계가 삐걱댈 경우 안보 불안 여론이 커지는 특성 탓에 첫 한미정상회담은 각 정권의 총체적 외교력을 측정하는 첫 관문이었다.
클린턴 “김대중 대통령이 한반도 운전대 잡아달라”
1998년6월9일 김대중 정권에서 이뤄진 첫 한미정상회담에서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은 한국의 대북정책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표명했다. 대북교류 확대를 통해 북한의 개혁ㆍ개방을 끌어낸다는 김대중정부의 햇볕정책이 1994년 북미 제네바합의 이후 북미 간 대화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 열린 한미정상회담에 때마침 녹아들 수 있었던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회담에서 햇볕정책에 대해 30분 간 설명했고, 클린턴 전 대통령은 “한반도 문제는 김 대통령이 주도해달라. 김 대통령이 핸들을 잡고 나는 보조하겠다”고 밝혔다. 클린턴 행정부의 김대중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전폭적 신뢰와 더불어 당시 북미관계 정상화 흐름까지 더해지며 김 전 대통령은 2000년6월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까지 열 수 있었다.
노무현, 이라크 파병으로 부시 회유
2001년 조지 부시 대통령이 집권하며 한국의 대북정책을 바라보는 미국의 기류는 180도 달라졌다. 새로 집권한 부시 행정부는 2002년 북한을 이라크, 이란과 함께 3대 악의축으로 규정했으며, 이는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햇볕정책과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한미 간 마찰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던 차에 부시 대통령은 2003년5월14일 첫 정상회담에 앞서 한국에 이라크 파병을 요청했다. 자주노선 성향이 강했던 노무현정부도 임기 초반부터 미국과의 갈등을 빚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결국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파병 요청을 전격 수용했다. 윤영관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은 회담 한 달 뒤 가진 간담회에서 “국민의정부(김대중정부) 당시 한미관계에 문제가 많았다”며 “이라크전 파병 결정으로 한미 간 신뢰가 회복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정상회담에서의 충돌은 피했지만 용산기지 이전과 전시작전권 환수 문제 등으로 건건이 부딪히며 노 대통령은 임기 내내 미국과 긴장 상태를 유지했다.
MB, 쇠고기 협상타결…촛불집회 역풍
2008년4월19일 이명박 전 대통령과 부시 전 대통령 간 첫 정상회담에서 양국은 당장의 북핵협상은 없다는 대북 기조에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명박정부의 비핵ㆍ개방 3000에 대한 부시 대통령의 지지가 이뤄졌고, 정상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부시 대통령은 임기 내 김정일을 만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NO”라고 일축했다. 대북정책 공감대를 바탕으로 양측은 전통적 우방관계였던 한미동맹을 범세계적 차원의 이익까지 공유하는 ‘21세기 전략 동맹관계’로 발전시켜 가기로 했다.
함정은 다른 데 있었다. 양측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연내 비준에 합의했으며 특히 검역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와 관련 협상타결을 선언했다. 부시 행정부와의 원만한 스킨십을 쌓은 반면 국내적으로는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 정국이 펼쳐지며 정치적 역풍을 맞게 됐다.
한미동맹 60주년…윤창중 대참사
박근혜-버락 오바마 대통령 간 2013년5월7일 한미정상회담은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60주년을 축하하고 미래 한미동맹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박 전 대통령의 방미에는 사상 최대 규모의 경제사절단이 동행했으며, 박 전 대통령은 상하원 합동회의에 초청돼 영어 연설을 통해 한미동맹의 발전 방향을 제시했다. 박근혜정부의 대북정책 한반도신뢰프로세스도 북한의 도발에 단호히 대응하되 대화의 문을 열어둔다는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기조와 대체로 호응을 이뤘다. 양국은 특히 기존의 포괄적 전략적 동맹관계를 이 정상회담을 계기로 명실상부한 글로벌 파트너십으로 격상시켰다. 한미방위비분담금 협상이나 전시작전권 환수 등 민감 이슈는 구체적으로 다뤄지지 않았다.
무난한 정상회담이 되가는 듯 했지만 윤창중 당시 청와대 대변인의 인턴 성추행 사건으로 모든 성과가 빨려 들어갔다. 정상회담 기간 중 청와대 대변인이 경질됐고, 한미동맹 60주년이 세계적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국내적으로는 박근혜정부의 인사시스템에 대한 비난이 거세졌고 박 전 대통령은 언론사 정치부장단 간담회에서 “저 자신도 굉장히 실망스럽다”며 사과해야 했다.
조영빈 기자 peoplepeopl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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