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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저녁을 찾아서] 독일 ‘근로시간 계좌제’… 저축한 추가근무 시간 언제든 꺼내 써

입력
2017.06.3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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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00인 이상 대기업 89%가 운용

육아나 여행에 써… 삶의 질 높아져

모았다가 3년 일찍 퇴직한 경우도

회사는 호황기 일땐 근로 늘리고

불황기에는 공장 가동 줄여

#2

9시간 근무 원칙 독일 관광버스 기사

목적지 못 가도 시간되면 운전대 놔

엄격한 노동시간 적용 등 밑받침

독일 제약회사 바이엘에서 영업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얀 부어크(맨 왼쪽)씨 가족. 부어크씨는 초과근무로 근로시간 계좌에 저축해 둔 시간을 빼서 일찍 퇴근해 세 아이를 돌보는 데 사용하고 있다. 뮌헨=박재현 기자
독일 제약회사 바이엘에서 영업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얀 부어크(맨 왼쪽)씨 가족. 부어크씨는 초과근무로 근로시간 계좌에 저축해 둔 시간을 빼서 일찍 퇴근해 세 아이를 돌보는 데 사용하고 있다. 뮌헨=박재현 기자

독일 뮌헨에서 제약사 바이엘 영업직원으로 일하는 얀 부어크(40)씨는 세 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5살 엠마, 3살 요나스, 태어난 지 1년도 안 된 야콥. 부어크씨는 매일 오전 7시30분에 요나스와 야콥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엠마를 유치원에 보낸 다음 오전 8시에 제약영업을 시작한다. 일주일에 이틀은 오후 6시에 퇴근하지만, 이틀은 오후 3시까지만 일하고 금요일엔 재택근무를 한다. 간호사로 일하는 아내가 병원에서 밤근무를 하는 날 일찍 퇴근해 아이들을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 데려오기 위한 것이다. 주당 40시간을 일하도록 돼 있는 부어크씨는 야콥이 태어나기 전 1년 동안 주당 45시간씩 일하며 저축해 놨던 시간을 요즘 일찍 퇴근할 때 꺼내 쓰고 있다. 휴일인 10일 뮌헨의 2층짜리 자택에서 만난 부어크씨는 연신 거실과 방을 오가며 정신없이 아이들을 돌보며 “아이 셋을 키우는 아빠 입장에서 근로시간 계좌제가 없었다면 육아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근로시간 계좌제란 노동자가 회사와 계약한 근로시간을 초과해 일한 만큼 자신의 계좌에 저축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쓰는 제도다. 하루 8시간 일하도록 돼 있는 직원이 10시간을 일했다면 2시간을 계좌에 기록해 두었다가 휴가를 쓰거나 근로시간을 단축하는 등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다. 장기계좌의 경우 쌓아 둔 시간만큼 조기 퇴직도 가능하다. 초과 근무를 했을 때 추가 수당을 받지 않는 대신 일을 쉬거나 줄이는 경우에도 똑같은 월급을 받을 수 있다. 독일에서는 전체 기업의 44%, 근로자 500명 이상 대기업의 89%가 이 제도를 운용하고 있을 만큼 일반적이다.

노동자 회사 지역까지 윈-윈-윈

노동자 입장에서 근로시간 계좌제는 가정을 돌볼 여유를 주는 동시에 노동 부담을 감당할 만하게 만드는 마술지팡이와도 같다. 독일 자동차 업체에서 일하는 한 근로자는 “추가 근무가 많지만 어차피 나중에 다 쓸 수 있는 노동시간이기 때문에 편한 마음으로 일한다”며 “동료 중에는 2주 동안 가족 여행을 다녀온 사람도 있고, 차곡차곡 모아 3년 일찍 퇴직한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회사 입장에서도 경기에 따라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어 요긴하다. 요한 프레이 BMW 인사 담당 대외협력팀장은 “근로시간 계좌제가 있기 때문에 회사가 경기에 따라 숨을 쉬듯 생산량을 조절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호황기에는 숨을 들이마시듯 근로시간을 하루 10시간까지 늘려 수요를 맞추고, 불황기에는 숨을 내쉬듯 공장 가동을 줄인다. 프레이 팀장은 “덕분에 불황기에 회사 경영이 어려울 때도 숙련된 노동자를 해고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피터 캐머허 BMW 종업원협의회 대변인은 지역사회 경제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계좌제를 이용해서 장기 휴가를 가는 게 독일에서는 일상이 됐습니다. 그렇게 여가에 지출하는 소비가 지역사회를 떠받치는 기둥이죠. 근로시간 계좌제는 노동자의 삶의 질을 높일 뿐만 아니라 출산율을 높이고 지역경제까지 윤택하게 만드는 제도입니다.”

계산 철저한 독일, 불안한 한국

독일 뮌헨 로펌에서 하루 6시간씩 파트타임 사무직으로 근무하는 정희영(39)씨는 점심을 먹지 않는다. 점심시간 때 일하는 대신 남들보다 1시간 일찍, 오후 2시30분에 퇴근한다. 아이를 돌보기 위해 이보다 더 일찍 퇴근해야 하는 날은 계좌에 저축해 놓은 시간을 빼 쓴다. “아이가 낮 12시15분에 학교가 끝나서 점심을 챙겨줘야 해요. 교대조로 일하는 아이 아빠 일정에 따라 제가 아이를 돌봐야 하는 날은 오전 11시30분에 퇴근하고, 대신 다른 날 더 오래 일해요.” 정씨는 “일찍 퇴근하기 위해 회사 승인을 받을 필요는 없다”며 “일찍 집에 가도 계좌에서 꺼내 쓰는 걸로 생각하는 문화여서, 내가 자리에 없다는 표시만 하고 가면 된다”고 말했다. 사후에 일한 시간을 팀장에게 보고하면 계좌에 근로시간이 쌓이거나 빠진다.

독일 바이에른주에서 활동 중인 이지원 노동전문 변호사는 “독일에서는 기본적으로 노사 신뢰가 강합니다. 출퇴근 시 카드를 인식해 근무시간을 기록하는 회사도 있지만, 손으로 써내는 회사도 많아요. 추가근무도 엄격한 검증은 불필요하고 노동자가 했다고 보고만 하면 근로시간 계좌에 올려줍니다. 그렇다고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올리는 사람도 없어요”라고 설명했다.

추가 근로나 조기 퇴근 등을 일일이 관리자가 감시하고 확인해야 한다면 근로시간 계좌제는 관리비용이 너무 커진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한국에서는 이를 우려하는 시각이 없지 않다. 2012년 이완영 자유한국당 의원의 대표발의로 기존 보상휴가제(대체휴가제)를 근로시간 계좌제로 확대하는 내용을 포함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상정된 적이 있었지만 통과되지 않았다. 이 의원은 “20대 국회에 다시 상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법안이 통과돼도 노사가 서로를 믿지 못한다면 ‘유령법안’이 되기 십상이라는 예측이다. 근로자가 노동시간을 부풀리려 하거나, 회사가 초과 근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경우 계좌제는 있으나마나다. 이 변호사는 “신뢰와 함께 노동자를 보호하는 법과 문화가 있어야 근로시간 계좌제가 제대로 시행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지원 바이에른주 노동전문 변호사. 이 변호사는 제도를 도입하기 전에 노동자 보호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뮌헨=박재현 기자
이지원 바이에른주 노동전문 변호사. 이 변호사는 제도를 도입하기 전에 노동자 보호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뮌헨=박재현 기자

한국에서 계좌제 성공하려면

신뢰는 서로 믿자는 말만으로 쌓이지 않는다. 독일의 경우 엄격하게 노동자를 보호하는 관련 법과 제도가 밑받침이 돼 굳건한 신뢰가 형성됐다. 예컨대 독일의 관광버스 기사는 하루 9시간 이상 운전이 법으로 금지돼 있어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해도 버스를 세우는 일이 있다. 버스에 장착된 GPS가 기사의 운전시간을 실시간으로 회사에 전송하고, ‘9시간 운전’을 어기면 회사가 관할 지방 정부로부터 경고ㆍ징계를 받기 때문에 기사가 운전대를 잡으려 해도 회사가 막는 상황이 종종 연출된다. 근로시간 계좌제도 사업장별 노조에 해당하는 종업원협의회가 상시 감시한다. 이 변호사는 “회사의 위반사항이 있으면 종업원협의회가 이사회에 안건을 상정해 징계한다”고 말했다. 제도를 어긴 관리자는 산별노조가 나서서 고발한다.

법 체계와 문화가 다른 한국에서는 근로시간 계좌제를 도입하려면 법 개정과 함께 여러가지 선결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우선 지금처럼 보장된 연차휴가조차 쓰지 못하는 장시간 노동 문화에선 계좌제가 유명무실해질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근로시간 계좌제 도입을 위한 법 개정과 함께 법정 근로시간과 휴가 보장 등 노동자 권익을 강력하게 보호하는 장치 마련이 병행돼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또 독일과 달리 초과 근무에 대한 수당 할증을 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도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회사는 추가 수당 대신 휴가를 주면 비용절감 효과가 있지만, 노동자 입장에선 계좌제를 반기지 않거나 할증 휴가를 원할 수 있다. 이승협 대구대 사회학과 교수는 “특히 야간ㆍ휴일근무 수당으로 낮은 급여를 보전하는 2,3차 하청업체 노동자의 경우 근로시간 계좌제로 임금이 감소할 가능성이 있다”며 “도입에 앞서 산별노조가 임금교섭권을 갖고 원-하청 업체 간 임금 격차를 어느 정도 줄여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예외 업종을 두지 말고 일률적으로 법을 적용해야 계좌제 시행이 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독일 사용자연합(BDA)의 나탈리아 스톨즈 단체협상부장은 “근로시간 계좌제는 노동자의 삶의 질 향상뿐 아니라 고용 유연성을 확대하는 역할도 하는 만큼 경제상황이 안 좋을수록 시행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변호사는 잘 시행되지 않을 것을 염려해 도입을 주저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한국이라고 왜 불가능하겠어요? 지금이야말로 적기입니다. 노사정이 토론을 통해 적절한 한국형 모델을 찾아내면 됩니다. 물론 노동자 보호 장치를 마련해 사각지대를 없애고, 기업문화 개선과 노사 교육도 병행해야죠. 그렇게만 한다면 얼마든지 새로운 노동환경을 열 수 있습니다.”

뮌헨ㆍ베를린=박재현 기자 remak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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