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시민단체 등 신청 '정치사안' 심사 배제
평화헌법ㆍ퉁저우사건ㆍ티베트학살 자료 등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가 일본이 신청한 세계기록유산 후보 중 일부 ‘정치적 사안’을 심사 대상에서 제외키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역사적 판단이나 해석은 하지 않는다’는 취지지만 침략 전쟁 관련 기록 등재에 강하게 반발하는 일본 정부의 압박에 굴복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일본 정부는 2015년 ‘난징(南京)대학살’ 자료가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자 정치적 편향성을 이유로 심사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는 제도개선을 요구했다. 또 분담금 지급을 미루며 실력 행사에 나서자 유네스코 측은 기록유산 선정 방법을 수정하는 방안을 검토해 왔다.
27일 아사히(朝日)신문에 따르면 유네스코는 최근 일본이 신청한 기록유산 후보 중 평화헌법으로 불리는 일본 헌법 9조의 처음 제안자가 시데하라 기쥬로 전 일본 총리라는 자료, 일본의 중국 침략 빌미가 된 퉁저우(通州)사건 자료, 티베트 학살 자료 등을 심사대상에서 제외하겠다고 신청자들에게 통보했다. 헌법 9조 자료는 시데하라 총리의 비서였던 히라노 사부로 전 중의원 의원이 총리에게서 청취한 문서와 맥아더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미 상원위원회 증언기록 등을 토대로 일본과 미국 시민단체 등이 지난해 기록유산 등재를 신청했다.
일본 헌법 9조 제안자는 맥아더 사령관이라는 설이 우세하지만, 시민단체 등이 신청한 문서를 보면 시데하라 전 총리가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력불보유를 포함하자고 제안한 것으로 돼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헌법 9조가 일본 패전후 연합군 총사령부의 강요로 만들어졌다”며 평화헌법 개정을 주장하고 있다.
유네스코 사무국은 4월 “기록유산은 정치적 당파성 비난을 받아선 안된다”며 등재 신청자들에게 통보했다. 또 “일본 정부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심사대상에서 제외한다”고 설명했다. 일본은 군위안부를 규칙대로 바르게 대했다고 주장하는 자료(일본과 미국 시민단체가 신청)와 퉁저우사건, 티베트 학살 관련 자료(일본 및 티베트 관계자가 신청) 등도 기록유산 등재를 신청했으나 비슷한 이유로 불허됐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도 한미일 시민단체는 공동으로 옛 일본군과 연합군의 공문서와 재판기록, 위안부 증언 등을 기록유산으로 등재해 달라고 신청했다. 한 관계자는 “아직 아무런 통보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일본은 2년 전 난징대학살 자료가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자 심사과정에서 이해 당사국에 반론 기회조차 없었다며 반발했다. 지난해에는 한중일 시민단체 등이 일본군 위안부 자료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신청하자 매년 내던 분담금을 내지 않고 버티다가 연말이 돼서야 38억5,000만엔을 내도록 방침을 바꿨다. 당시에도 위안부 자료심사와 등재 저지를 위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많았다.
김이삭 기자 hir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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