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오전 8시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백양관 정문. ‘제59회 사법시험 제2차 시험 시험장’이라고 쓰인 플래카드 밑에 자신의 몸통만한 백팩을 맨 응시생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걸으면서도 손에 든 노트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건 여느 때와 다름없었지만, 이날 시험을 보는 수험생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마지막 사법시험이라는 일생일대의 기회 앞에 긴장감은 역력했다.
‘희망의 사다리’로 불리던 사법시험이 올해를 끝으로 폐지된다. 시행 54년 만이다. 이번 시험에 응시한 186명 중 약 4분의 1인 50명만이 ‘마지막 사시합격자’가 된다. ‘파란츄리닝’을 입고 ‘삼선슬리퍼’를 신은 채 법전을 펼치고 공부하는 ‘고시생’의 원조 ‘사시생’들 역시 사법시험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개천 용’ 되기 위해 너도나도 ‘사시생’ 되다
‘사법시험’을 통해 법조인을 뽑기 시작한 건 1964년부터다. 광복 직후인 1947년부터 2년간 시행된 조선변호사시험, 1950년부터 1963년까지 시행된 고등고시 사법과가 바뀌어 지금과 같은 이름을 얻었다.
사시는 ‘개천 용 탄생의 장’이었다. 나이와 성별, 출신지에 상관없이 누구나 응시할 수 있는 시험이었기 때문이다. 대학졸업자 수준이란 학력 기준은 있었지만, 별도의 예비시험 제도 덕분에 사실상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시험을 볼 수 있었다. 공인영어시험점수ㆍ법학과목 35학점 이상 이수 등의 응시 조건이 생긴 것도 2000년대 이후다. 활짝 열린 출세의 문 앞에서 소위 ‘수저’ 구분 따윈 필요 없었다.
때문에 ‘공부 좀 한다’ 는 사람들은 물론, 가난한 집안의 명운을 짊어진 청년들은 대거 ‘사시생’이 됐다. 구두닦이 출신 청년이나 환경미화원의 아들이 어려운 환경을 딛고 합격했다는 미담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가난으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해 소년시절부터 공장에서 일하다가 변호사로 입문하면서 유력 대선주자에 오른 이재명 성남시장이나 자칭 ‘흙수저’ 가정에서 자라 ‘모래시계 검사’ 명성을 얻고 도지사까지 지낸 홍준표 전 경남지사 등도 ‘개천용’의 전형이다.
사실 가난 아닌 다른 차별 앞에도 사시의 문은 열려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50년지기로 알려진 김정학 인천지법 부장판사는 소아마비로 몸이 불편했지만 노력으로 승부를 봤다. 지난 2008년엔 최영(37)씨가 시각장애인 최초로 사시에 합격해 판사로 임관했다. 민간분야에서 유리천장에 막혔던 여성들도 차별 없이 능력을 평가 받기 위해 사법시험에 도전했다. 2010년 이후 여성 사시합격 비율은 40% 안팎이다.
신림9동 ‘고시촌’에 생긴 사시 생태계
매년 사시 응시자가 수 천여명으로 늘어나면서, 사시생들만의 ‘서식지’도 생겼다. 서울 관악구 신림9동이다. 1970년대 말부터 ‘고시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이곳은 원래 사시 응시생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서울대 출신 수험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곳이었지만, 타학교ㆍ타지역 출신 사시생까지 모여들어 하나의 생태계를 형성했다. 1.5평(4.95㎡)짜리 고시원, 헌법1순환ㆍ주관식 형사소송법등의 수험서만 파는 ‘고시책방’, 주머니 가벼운 사시생들에게 값싼 월식권을 판매하는 ‘고시식당’ 등이 들어찼다.
고시촌 조성 초반까지만 해도 독서실 책상에서 머리 싸매고 앉아 법전을 달달 외우던 사시생들은 1990년대 들어 ‘고시학원’이라는 새로운 서식지로 옮겨갔다. 1994년 제36회 사법시험 2차시험 합격자의 상당수가 모 고시학원 출신인 사실이 알려지면서 합격에 목마른 이들은 너도나도 해당 학원으로 쏠렸다. 학원들은 저마다 ‘스파르타식 관리’ ‘철저한 모의고사’ 등의 조건으로 수험생들을 유인했다. 강의실 자리가 모자라 옆 강의실에서 강사의 비디오 생중계를 보는 진풍경도 등장했다. 입시 사교육이 고시로 넘어왔다는 비난도 나왔다. 이원영ㆍ신호진씨 등 장수생 출신으로 스타강사가 돼 인생역전을 한 사람들도 나왔다.
고시촌이 위치한 신림9동 동사무소는 지역 특색을 살려 ‘고시생 서비스센터’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사시생들은 동사무소 안에 위치한 헬스장에서 체력단련을 하고 공짜 프린트도 했다. 이 곳에서 사시 원서를 쓰거나 건강검진도 받았다. 2003년 법무부는 신림9동 사무소에 전국에 교부하는 사시원서의 20%인 6,000부를 교부하기도 했다.
사시는 ‘실패’의 역사… 전체 응시생 중 약 3%만 합격
하지만 청운의 꿈을 안고 고시촌 한 켠에 자리잡은 사시생 중 웃으며 나간 사람은 지극히 드물다. 지금까지 70만8,276명이 사법시험에 응시했지만 합격한 건 2만 718명으로, 2.9%에 불과했다. 이처럼 사법시험은 사실 ‘실패’의 역사다. 세상은 합격자만을 조명했했다.
2014년에 천도정 전북대 교수가 발표한 ‘법조인 선발제도별 법조계 진입 유인 실증 분석’ 논문에 따르면 사시 합격에 걸리는 시간은 평균 4.79년이다. 청춘의 금쪽같은 5년, 비단 청춘이 아니더라도 아까울 긴 시간을 기약 없이 시험에 쏟는 건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오랫동안 시험을 준비한 일명 ‘장수생’들 중에는 각종 사건사고에 휘말리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우도 많다.
2007년 한 사시생은 서울대 중앙도서관 안에서 고시서적을 훔치다 절도혐의로 경찰에 붙잡혔다. 7년간 시험에 낙방하면서 새로 책을 구입할 돈이 궁해지고 부모님께 손을 벌리기도 미안했다는 게 이유였다. 1996년에는 5차례 낙방한 사시생이 ‘여자 속옷을 갖고 있으면 합격한다’는 속설을 듣고 고시촌 주변 주택가를 돌아다니며 속옷을 훔치다 붙잡히기도 했다. 오랫동안 합격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투신하는 사건도 나왔다. 1995년엔 사시에 4차례 낙방한 뒤 처지를 비관해 분신으로 목숨을 끊은 사시생도 있었다. 로스쿨 도입논의에 ‘고시 낭인 방지’라는 이유가 포함된 것도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마지막 사시 2차 시험이 한창 진행중이던 21일 오전 10시, '사법시험 존치를 위한 고시생모임(고시생모임)' 회원 30여명은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법시험은 57년간 한 번도 공정성에 관한 시비가 없었을 정도로 공정사회의 상징과도 같은 제도이며 국민 85%가 사법시험 존치에 찬성한다"며 “사시존치 투쟁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사시는 이들이 말하는 것만큼 완전무결한 시험은 아니었다. 1999~2000년엔 시험문제에 오류가 나서 정답자들이 대거 탈락했고, 피해를 본 사시생 백여명이 집단 소송에 나서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출제위원들이 하루 만에 문제를 고르는 등 다소 느슨하게 관리됐지만, 이 사건 이후 출제위원의 10일 합숙ㆍ문제 재검토 등으로 제도가 보완됐다.
‘개천 용’ 효과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다. 이재협 서울대 교수 등이 2015년 발표한 논문 ‘로스쿨 출신 법률가, 그들은 누구인가’에 따르면, 사시의 계층이동 사다리 효과는 날이 갈수록 약해지는 중이다. 특히 2009~11년 사이 로스쿨 입학생과 사법연수원 부모 중 전문직 비율은 두 집단 모두 약 17% 안팎이다 반면 같은 해 이호선 국민대 교수가 발표한 '2009년 이후 사법연수원 출신 법조인의 인구사회학적 특성에 관한 연구'는 설문에 응답한 사법연수원 40~46기 합격자 1,286명 중 58.6%가 월소득 300만원 이하 가정 출신이라며 사시의 ‘사다리효과’가 여전하다고 분석했다.
진실이 무엇이든, 올해 이후 ‘사시생’은 사라지고 ‘로스쿨생’이 비슷한 위치를 차지할 전망이다. 하지만 고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고졸 출신 변호사가 다시 등장하는 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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