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인터뷰를 위해 만난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39)은 왼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인터뷰 4일 전인 지난달 20일 기부금 모금을 위해 지리산과 전남 구례군 일대 100㎞를 걷는 ‘옥스팜 트레일 워커’에 참여했다가 다친 탓이다. 다친 다리를 이끌고 지난달 23일엔 경기 고양시 홀트학교 대강당에서 홀트학교 예그리나 오케스트라와 작은 음악회도 열었다. 피아니스트 임동혁과 함께 홍보대사로 위촉된 ‘평창 스페셜 뮤직&아트 페스티벌’을 알리기 위해서다. 인터뷰 다음날인 지난달 25일에는 서울 광진구 중마초교를 찾아 아이들에게 음악을 들려주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오닐은 ‘음악은 나누기 위한 것’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그리고 따뜻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음악가다. “오늘날까지 자신을 키운 건 인간애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그는 말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가르쳐 준 조부모, 음악 선생님, 지금 함께 일하고 있는 동료들, 오래된 친구들이 모두 자신의 선생님이라고 했다.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 온 동네 사람들의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잖아요. 저는 자라면서 그런 보살핌을 받았고 그 점이 저를 만든 가장 큰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용재 오닐의 성장 배경은 익히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으로 고아가 된 그의 어머니는 홀트 재단을 통해 미국으로 입양됐다. 어머니가 입양된 후 조부모는 그녀에게 지적장애가 있다는 걸 알게 됐지만 한 번 품에 들어온 딸을 시설로 보내지 않았다. 음악을 배우러 선생님을 찾아가야 했을 때 할머니는 한 시간씩 손수 운전을 했고, 바이올린 선생님에게 혹평을 들은 손자에게 “너는 매일 발전하고 있다”며 힘을 줬다.
인간적인 면에서 오닐에게 정신적 지주가 됐던 사람이 할머니라면, 음악과 예술적인 면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미국 남캘리포니아대학(USC)에서 만난 은사 도널드 매키니스 교수다. 오닐은 “아버지 없이 자란 저에게 아버지 역할을 해주신 분”이라고 소개하며 “이렇게라도 선생님을 언급할 수 있어 감사하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떻게 인연이 된 건가.
“노스캐롤라이나 음악학교에서 공부를 한 뒤, 지인으로부터 매키니스 교수를 사사하라는 조언을 들었다. 오디션을 보기 위해 로스엔젤레스까지 날아갔다. 원래는 USC에 입학하려고 한 건 아닌데 교수님과 뜻이 맞아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게 됐다. 2001년까지 4년 간 배웠다.”
-어떤 부분에서 영향을 받았나?
“비올라를 사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올라가 독주를 하는 악기로서 웅장하다는 이유로 좋아하는 게 아니다. 어두운 면이 있으면서도 따뜻한 소리와 중간의 음역대로 모든 악기와 조화를 이룬다는 점, 동시에 자신이 돋보이지는 않는다는 점 등에서 매력을 느낀다. 나도 처음에 그랬다. 매키니스 교수를 처음 만날 무렵 내 연주 소리는 강한 부분(포르테)을 연주해도 뻗어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교수님은 ‘더 크게, 대담하게 연주하라’고 하시더라. 내 성격 자체가 내성적이라 그 부분이 힘들었다. 연주 기교의 문제가 아니라 소리 색채를 만들어내는 게 힘들었는데 그로 인해 음악적으로 더 열리게 됐고 소통 할 수 있게 됐다. 음악은 2,500명의 관객이 앉아 있는 홀에서 한다. 소극적으로 연주하면 누가 음악에 공감하겠나. 음악은 내가 생각하는 소리가 어떤지에 안주하는 게 아니라 관객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에 주안점을 둬야 한다는 교수님의 가르침에 공감하게 됐다. 음악은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해주신 분이다.”
-엄한 선생님과 부드러운 선생님 중 어디에 가까웠나.
“전문음악인으로서 갖춰야 할 전문성과 정신을 일깨워 주신 분이기도 하다. 돈을 지불하고 콘서트에 온 관객들에게 수준급의 음악을 들려주는 게 전문음악인의 일이다. 음악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음악인이라고 할 수 없다. 그걸 가르쳐 주셨다. 불행하게도 세상은 경쟁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런 현실적인 면을 알게 해주셨기에 항상 어느 정도 이상의 수준을 늘 만들어내고자 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난 좋은 선생님은 못 된다. 학생들에게 냉정하게 따끔하게 대하지 못한다.”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에피소드는 너무나도 많다. 1999년 9월 산타바바라에 있는 음악 축제에서 그의 마스터클래스 레슨을 받았다. 그 해 여름 할머니께서 돌아가셔서 마음을 잡기가 힘든 때였다. 연주를 시작하자마자 교수님이 ‘너무 많이 움직인다’며 날 멈춰 세웠다. 그리고는 벽에 딱 붙어서 연주하라고 하셨다. 공개 레슨이니까 다른 사람들도 많은 장소였다. 너무 놀랐고 트라우마로 남기도 했는데, 굉장히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악기 현과 내가 얼마나 밀착 돼 있는지에 따라 악기 장악력이 달라지는데, 그 부분을 정확히 꿰뚫고 고치게 만들어줬다.”
-20년 동안 사제 관계였는데, 좋아하는 음악도 비슷한가.
“특정 곡으로 말하기는 어려운데 브람스를 좋아한다는 점이 같다. 물론 대부분의 음악가들이 브람스를 좋아한다. 미국 버몬트주에서 열리는 말보로 음악 축제가 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1970년 교수님이 이곳에서 브람스의 현악 5중주 2번(op.111)을 연주하셨는데, 30년 후 내가 같은 음악제에서 같은 곡을 연주했다. 인생의 흐름을 볼 때 교수님이 음악가로 살아온 길을 내가 따라 밟고 있어 뿌듯하다.”
-요즘도 자주 만나나.
“개인적으로 1년에 2~3번은 본다. 애정을 많이 주셨다. 2005년 뉴욕 카네기홀에서 열린 데뷔 독주회, 2006년 에버리 피셔상을 수상할 때도 직접 와서 축하해주셨다. 런던필하모닉과 협연할 때는 스페인 마드리드까지 와서 들어주셨다. 내 활동과 성취에 대해 지지해주고 자랑스러워하신다. 70세 생신 때쯤, 이분이 사는 팜스프링스까지 3시간을 직접 운전해 찾아갔다. 다음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직접 요리를 해서 챙겨드렸다. 정말 하루 종일 요리를 했다. 그때 인상 깊으셨는지 아직까지도 그 얘기를 하신다. 어머님도 교수님도 더 자주 찾아 뵙지 못하지만 나만의 방식으로 애정과 존경심을 표현하고 있다.”
-단순히 음악 선생님 이상인 것 같다.
“그렇다. 1999년 여름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힘들어 하던 때 그에게 전화가 왔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학생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런데 선생님은 ‘돌아와서 공부하라’고 하더라. 당시에 슬퍼하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는데 교수님의 말씀이 맞았다. 결국은 저를 돌봐 주신 거고, 제게 음악을 주신 분이시다. 에버리 피셔 상을 받고 난 후에는 ‘이제 같은 음악인’이라면서 ‘도널드’라고 부르는 걸 허락해주셨다.”
-‘앙상블 디토’도 알고 계신가
“사실 디토에 대해 정확히는 모르시고 아직 연주를 직접 들어보신 적은 없지만 굉장히 자랑스러워 하신다. 다른 사람들과 저녁을 함께 먹으러 가면 ‘리처드 한국에서 엄청 유명하다. 실내악을 스타디움에서 연주한다’며 자랑을 하신다. 사실 스타디움에서 하는 건 아닌데 좋아하신다.(웃음)”
오닐은 지금도 자신을 “배우는 학생”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자신보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라도 배울 수 있다. 동시에 나이가 얼마나 차이가 나든 친구가 될 수 있다. 이제 그에게 매키니스는 조언을 아끼지 않고 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게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한 사람의 친구로서 함께 하는 듯하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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