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액 21조6000억원 열세에도
상생전략 내세운 한미일 컨소시엄
우선협상자로 선정돼 막판 역전승
SK, 지분투자 대신 대출방식 참여
원조 기술력 확보하는 기회 잡아
28일 주총서 인수자 최종 확정
매각 마무리는 내년 3월 목표로
SK하이닉스가 참여한 ‘한미일 연합’이 혼전을 거듭한 끝에 일본 도시바(東芝)의 반도체 자회사 도시바메모리 인수전에서 역전승을 거뒀다. 낸드플래시 메모리 반도체 후발주자인 SK하이닉스는 신규 업체의 시장 진입을 차단하는 동시에 향후 도시바의 기술력을 활용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상생 전략이 돈을 꺾었다
도시바는 21일 이사회를 개최해 “일본 민관펀드인 산업혁신기구와 미국 사모펀드 베인캐피털, 일본정책투자은행이 구성한 컨소시엄을 도시바메모리 매각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SK하이닉스 이름은 발표 자료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베인캐피털과 손잡고 컨소시엄에 합류했다. 도시바메모리와 업종이 같은 SK하이닉스는 각국의 반독점 심사를 피하기 위해 지분 투자가 아닌 융자(대출) 방식으로 인수에 참여한다.
치열했던 인수전은 이달 초까지 2조2,000억엔(약 22조6,000억원)을 써낸 미국 시스템 반도체 기업 브로드컴과 미국 사모펀드 실버레이크파트너스 컨소시엄으로 판세가 기우는 분위기였지만 막판에 결과가 뒤집어졌다. 메모리 반도체 사업 진출을 위해 무려 3조엔(약 30조8,000억원)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진 대만 훙하이정밀공업(폭스콘)은 애플 등 글로벌 정보기술(IT) 업체들까지 끌어들이며 전력투구를 했지만 헛물을 켰다.
한미일 연합이 도시바에 제안한 최종 인수금액은 2조1,000억엔(약 21조6,000억원)으로 알려졌다. 금액 면에서는 열세였지만 일본 내 메모리 반도체 사업의 근간을 흔들지 않겠다는 상생 전략이 한미일 연합 승리의 발판이 됐다. 도시바 측도 “선정된 컨소시엄이 기업 가치 측면이나 임직원 고용 승계, 민감한 기술 유출 방지 등에서 가장 좋은 제안을 했다”고 밝혔다.
미국 원전 사업 실패로 상장폐지 위기에 처한 도시바는 미에(三重)현 욧카이치(四日) 공장을 공동운영 중인 미국 웨스턴디지털의 강한 반발을 뿌리치고 주주총회가 열리는 오는 28일 도시바메모리 인수자를 최종 확정할 계획이다. 매각 마무리는 내년 3월 말이 목표다.
SK하이닉스 ‘큰 그림’ 그렸다
당초 베인캐피털과 함께 약 1조엔을 제시해 인수권에서 멀어진 SK하이닉스는 막판에 미일 연합과 극적으로 손을 잡으며 반전 시나리오를 썼다. 지난 4월 “단순히 기업을 돈 주고 산다는 개념이 아니라 협업할 수 있는 여러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한 최태원 SK 회장의 전략이 그대로 맞아떨어진 셈이다.
도시바메모리 인수를 위해 한미일 컨소시엄은 각각 3,000억엔 안팎을 투자해 특수목적회사(SPC)를 세우고, 나머지는 일본 중소기업 출자와 대출 등으로 충당할 계획이다. 최종 분담율은 28일 확정 예정이다. SK하이닉스가 부담할 몫은 3,000억엔(약 3조800억원) 정도로 파악되는데 지분투자가 아닌 대출이다. 향후 주식교환 등의 조건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지분을 얼마나 확보할 수 있을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다만 컨소시엄 참여자들 중 낸드플래시 메모리 사업을 하는 전략적투자자는 SK하이닉스가 유일해 기술협력의 연결고리를 만들기 유리하다. 도시바는 전원이 끊겨도 데이터가 보존돼 스마트폰 등 모바일 기기에 폭넓게 사용되는 낸드플래시의 원조다. 관련 특허의 양과 질도 업계 선두 급이다. 아직 경쟁사보다 낸드플래시 기술이 부족한 SK하이닉스로서는 도시바와 장기적인 협력관계 속에 기술력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여기에 대규모 자본으로 무장한 중화권 기업의 낸드플래시 사업 진출을 막는 효과도 얻었다. 3조원 수준에 그치는 투자액은 역설적으로 과도한 인수금액을 투입했다 나락에 떨어지는 ‘승자의 저주’ 위험을 애초에 차단한 이점도 있다.
산업연구원 주대영 명예연구위원은 “SK하이닉스는 어떤 식으로든 도시바메모리 인수에 뛰어들어야 했고 결과적으로 반전의 기회를 만들었다”며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의 입지가 더욱 굳건해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창훈 기자 ch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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