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 요구∙정권교체 맞물린
백남기씨 진단서 변경, 드문 사례
작성 지침 있지만 강제력 없어
의료계 일각서도 개선 목소리
서울대병원이 고(故) 백남기(사망 당시 69세)씨 유족에게 사망 종류를 기존의 ‘병사’에서 ‘외인사’로 바꾼 새 사망진단서를 20일 발급했다. 이로써 지난해 9월25일 백씨 사망 이후 불거졌던 사인(死因) 논란은 일단락이 났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관련 제도를 손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대병원은 새 사망진단서에 ▦직접사인은 급성신부전 ▦중간사인은 패혈증 ▦선행사인은 외상성 경막하 출혈로 각각 명시하고, 사망 종류는 ‘외인사’로 분류했다. 이 병원은 지난해 백씨 사망 직후 직접사인으로 심폐정지를, 사망 종류로 ‘병사’를 적시한 사망진단서를 발급해 시신을 부검해야 한다는 경찰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그러나 이번 사망진단서 변경은 시민사회와 의료계의 요구, 정권 교체 등이 맞물려 일어난 극히 드문 사례다. 사망진단서는 유족이나 다른 의사의 지적에도 바뀌는 일이 거의 없다. 진단서 작성과 수정이 ‘전문성의 영역’이라는 이유로 담당 의사의 재량에 100%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정형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정책국장은 “다른 의사들이 진단서의 오류를 지적하더라도 담당 의사가 소신을 내세우면 고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이번 변경도 주치의였던 백선하 교수는 여전히 ‘병사’를 고집했지만, 당시 백 교수가 직접 진단서를 작성한 것이 아니라 전공의를 통해서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망진단서 작성 지침이 있긴 하지만, 지키도록 강제할 방법은 없다. 실제 대한의사협회의 ‘진단서 등 작성ㆍ교부 지침’은 ‘사망 원인에는 심장마비, 심장정지, 호흡부전, 심부전과 같은 사망의 양식(mode of death)은 기록할 수 없다’고 안내하지만, 백씨의 이전 사망진단서에는 사망의 양식에 해당하는 ‘심폐정지’가 버젓이 직접 사인으로 기재돼 있다. 이상윤 건강과대안 책임연구원은 “부정확한 사망진단서에 의존해 통계청의 사망원인통계가 만들어지다 보니, 통계를 믿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고 말했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망진단서로 유족이 고통을 받기도 한다. 황영순(사망 당시 56세ㆍ여)씨는 2009년 6월 전북 익산시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뒤 7년 간 병원 생활을 하며 수술을 19차례나 받았지만 지난해 8월18일 끝내 숨졌다. 의협의 진단서 작성 지침은 ‘외상의 합병증으로 질병이 발생해 사망하면 외인사’라고 명시하고 있지만, 서울대병원은 사망 종류를 ‘병사’로 분류했다. 황씨의 직접 사인인 패혈증이 교통사고의 합병증으로 볼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아들 김형진(32)씨는 사망진단서의 사망 종류를 납득하지 못하지만 이의를 제기할 마땅할 창구도, 절차도 없어 한동안 서명 운동을 벌이다가 최후의 수단인 민사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의료계 내부에서도 관련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형준 정책국장은 “의료인 등이 참여하는 법적 위상을 가진 위원회를 만들어 진단서 허위 작성 등 윤리적 문제가 있는 의료인에 대해 위원회가 의사 면허 갱신 여부를 결정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신중론도 있다. 의협의 진단서 작성 지침을 쓴 이윤성 서울대 법의학교실 교수는 “이번 논란은 관련 의사들이 지침을 제대로 숙지하지 않아 생긴 일”이라며 “지침을 강제하기보다는 지침의 교육과 홍보를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지난 2월엔 사망진단서의 작성과 수정 주체를 명확히 한 의료법 개정안도 의원입법으로 발의된 상태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과장은 “향후 법안 논의 과정에서 개선할 부분이 있는지 살펴보겠다”고 말했다.
이성택 기자 highnoon@hankookilbo.com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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