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 쉽게 하되 안전망 구축하고
수도권ㆍ그린벨트 규제 완화 필요
“재정확대로 수요 늘이기보단
공급 혁신의 뒷받침 돼야 할 것”
文대통령과 오랜 동반자 관계
집권 후반 정책 예고편 해석도
노무현정부 후반부 청와대는 ‘문재인 비서실장(정무)-변양균 정책실장(정책)’ 투 톱 체제였다. 이후 두 사람은 끈끈한 ‘동지적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문 대통령의 두 차례 대선도전 과정에서도 변 전 실장은 상당한 정책 조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변 전 실장은 “이번 대선캠프에는 참여하지도 않았고 이름도 올리지 않았다. 나와 문 대통령은 그런 공식적 관계가 아니다”고 말하지만, 그와 가까운 인사들(김동연 경제부총리, 홍남기 국무조정실장, 이정도 청와대총무비서관)이 요직에 대거 등용돼 ‘변양균 라인’이란 말이 등장했을 만큼 현 정부에서 그의 위상은 여전히 막강하다는 게 관가의 정설이다.
그가 새 정부 출범에 맞춰 우리나라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정책제언을 담은 책 ‘경제철학의 전환’을 19일 출간했다. 갈수록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 있는 저성장의 늪에서 벗어나려면 수십 년간 우리나라 경제정책의 골간을 이뤘던 ‘케인스주의(금융ㆍ재정확대를 통한 수요창출)’에서 벗어나 이제는 ‘슘페터주의(공급 혁신)’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게 책의 요지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공공일자리 확대와 복지지출 증대 등 정부 주도의 강한 케인스식 정책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문재인 정부의 초반 기조와는 다소 상충되는 측면이 있다. 특히 변 전 실장은 ▦기업의 해고 자유 확대 ▦부가가치세율 5%포인트 인상 ▦그린벨트 전면 해제 ▦금융규제 네거티브화 ▦세계 최고 수준의 이민개방 등 현 정부에선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방법론까지 제시하고 있다. 때문에 책에 담긴 변 전 실장의 주장은 ‘J노믹스(문재인 대통령의 경제정책)’에 대한 제언인 동시에, 집권 후반부 펼쳐질 정책 방향의 예고편으로도 해석되고 있다.
“세상이 달라졌다”
변 전 실장은 서문에서 자신이 노무현정부의 ‘비전 2030’ 수립을 주도하던 때와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정보화 사회가 막 시작됐던 10년 전과 달리 지금은 인공지능을 중심으로 한 4차 산업혁명 시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최상위 목표(국민 삶의 질 향상)는 여전하지만 시대가 바뀐 만큼 수단도 달라져야 한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그는 이어 “모든 정책실행에는 크든 작든 기득권의 저항이 불가피해 왜 바꾸고 개혁해야 하는지를 설명할 철학이 먼저 제시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서로 대립하는 이해 당사자에게 발전 과정에서 생기는 이익을 공유할 ‘당근’을 제시해야 하며, 이 당근은 현안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패키지 딜’을 통해 나눠져야 한다”는 게 그의 접근법이다.
책의 골간이 되는 케인스와 슘페터는 20세기 경제학의 ‘양대 산맥’에 비견되는 대가들이다. 현대 자본주의 국가의 경제 정책은 케인스식 금융정책과 재정정책을 혼합해 총수요를 관리하는 게 골자였다. 하지만 케인스주의는 갈수록 정책효과가 떨어지는 동시에 분배구조가 악화되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변 전 실장은 이에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기업가들이 노동ㆍ토지ㆍ자본이란 생산요소를 자유롭게 결합해 ‘창조적 파괴’를 할 수 있어야 성장을 약속할 수 있다”며 “정부가 재정확대를 통해 할 일은 케인스식 수요 확대가 아닌 슘페터식 공급 혁신 뒷받침이 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문 정부, 4가지 자유 보장해야”
변 전 실장은 기업가를 통한 슘페터식 성장을 구현할 방법론으로 4가지 자유를 제안했다. 첫째 ‘노동의 자유’다. 그는 기업에게 고용과 해고의 자유를 지금보다 넓게 보장해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신 국가는 실업 안전망을 높이고 가계의 지출 부담이 큰 주거ㆍ교육ㆍ보육비를 획기적으로 줄여 노동자가 기업과 대등한 관계에서 노동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 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를 위해 공공임대주택 확대, 고교 무상교육, 대학 반값등록금, 아동수당제 도입 등이 필요하며 재원 마련을 위해 부가가치세율 5%포인트 인상, 연구개발(R&D) 예산 절반 축소, 과세 강화 등이 뒤따라야 한다고 주문했다.
둘째 ‘토지의 자유’다. 국내에서 기업가의 자유로운 생산요소 결합을 방해하는 대표 요소가 비싼 땅값인데, 이는 각종 규제로 쓸만한 토지가 절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분석이다. 변 전 실장은 우선 수도권 규제완화를 제안했다. 비수도권의 반발은 규제 완화로 생기는 조세수입을 수도권규제완화특별기금 등으로 지방과 공유하는 방식으로 풀자고 제시했다. 또 “중산층의 기본수요인 레저생활까지 가로막는 그린벨트는 ‘뼈대만 남은 시대착오적 제도’”라며 “환경문제를 보완해 과감히 해제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셋째 ‘투자의 자유’엔 금융 혁신이 필수적이다. 그는 국내 은행의 담보대출 위주 ‘전당포 영업’을 강하게 비판하며 ▦산업은행을 벤처투자 전문기관으로 전환하고 ▦은행의 중소기업 신용대출을 의무화하되 정부가 신용위험을 분담하고 상시 구조조정을 추진할 것을 제안했다. 또 현재 법에 명시된 사업만 허용하는 ‘포지티브’ 금융규제를 법에 금지 사업만 표기하고 나머지는 원칙적으로 허용하는 ‘네거티브’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 ‘왕래의 자유’를 통해 그는 한국이 세계 우수인력, 자본, 상품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플랫폼 국가’가 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민청ㆍ해외투자유치청 설립 ▦해외 고급인력 인센티브 제공 등을 통해 “세계 최고 수준의 개방”으로 우수 인재ㆍ기업을 필사적으로 유치한다면, 4대 군사강국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리스크가 4대 강국이 함께 보호할 대상이 되는 이점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게 변 전 실장의 생각이다.
김용식 기자 jawohl@hankookilbo.com
◆슘페터주의란
오스트리아 태생으로 20세기 초 빈 학파를 이끈 요제프 슘페터(1883~1950)가 주창한 경제이론. 자본주의 경제 발전은 혁신기업가에 의한 균형 파괴와 회복에 달렸다고 주장했다. “경제성장의 열쇠는 슘페터가 쥐고 있다”(프랑스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 “21세기 가장 중요한 경제학자는 슘페터”(전 미국 국가경제위원회 의장 로렌스 서머스) 등 케인스주의의 대안으로 주목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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