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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조선 ‘스펙형 인간’을 끝내기 위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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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조선 ‘스펙형 인간’을 끝내기 위한 방법

입력
2017.06.1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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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경제, 창조경제의 시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스웨덴은 정부의 역할을 '도서관'에 비유했다. 너의 지식을, 창조성을 내놓으라고 호통칠 게 아니라, 정부가 함양시켜주겠다는 얘기다. 사진은 스웨덴 독서클럽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식경제, 창조경제의 시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스웨덴은 정부의 역할을 '도서관'에 비유했다. 너의 지식을, 창조성을 내놓으라고 호통칠 게 아니라, 정부가 함양시켜주겠다는 얘기다. 사진은 스웨덴 독서클럽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도서관과 작업장

엔뉘 알데르손 지음ㆍ장석준 옮김

책세상 발행ㆍ352쪽ㆍ1만8,000원

스칸디나비아 모델, 노르딕 모델, 북유럽 모델 또는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 모델은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 각 언론사의 신년ㆍ창간 기획 속 북유럽은 둘도 없는 이상향이다. 경제 기사로 가면 대책 없는 포퓰리즘이다. 정치 기사로 가면 숫제 빨갱이다. 북유럽 모델에 관심 있는 이들은, 이렇게 자기가 보기에 좋은 것만 딱딱 떼와서는 북유럽을 천국, 혹은 지옥으로 분칠하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 해석에 넌덜머리를 낸다.

전혀 다른 차원도 있다. 북유럽 모델이라는 게, 실은 위대한 아리안민족 운운해댄 나치 비슷한 거라고. 우리에게 더 직접적으로 피부로 느껴지는 표현을 쓴다면 ‘일제 총동원 체제’ 비슷한 거라고. 다만 조금 더 부드러운, 그래서 달리 말하자면 조금 더 교묘하고 교활한 나치이자 일제일 수도 있다고. 역겨울까, 아니면 ‘반만년 단일민족’ 신화가 있으니 우리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싶을까.

그렇기에 스웨덴 사회민주당과 영국 신노동당 노선을 각각 ‘도서관과 작업장’에다 비유한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북유럽 사민주의 모델을 천국ㆍ지옥 이분법에 가두지 않는다는 데 있다.

책의 가장 큰 뼈대는 스웨덴 출신인 저자가 영국 신노동당의 기수 토니 블레어로 상징되는 ‘제3의 길’을 재평가하는 작업이다. 한동안 각광받았던 ‘제3의 길’은 유럽 좌파를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한 잘못된 길로 치부되어 버렸다. 저자는 이런 일률적인 해석에 반대한다. 그가 보기에 ‘제3의 길’은 현실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온 유럽 사민주의 전통 위에 서 있다. 더구나 ‘제3의 길’이 지향한 여러 요소들은 1930년대, 그리고 1980년대 스웨덴 사민당에서 이미 시도된 바 있다.

다시 말해 스웨덴 사민당 노선이 국내외 선전처럼 그렇게나 압도적으로 훌륭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으며, 영국의 ‘제3의 길’ 또한 그렇게 해괴망측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동시에, 그렇지만 영국의 제3의 길은 확실히 지나친 점이 있었고 스웨덴의 사민주의는 그 지나친 부분을 그나마 잘 참는 데 성공했다는 게 저자의 해석이다. 똑 떨어지는 흑백 이분법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이랬다 저랬다 어쩌라는 거냐 싶을 부분이고, 미묘한 결을 즐기는 이들에겐 20세기 사민주의 역사에 대한 흥미로운 안내서가 될 법 하다.

전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셰릴 버먼이 ‘정치가 우선한다’(후마니타스)를 통해 주장했듯, 20세기 역사를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사민주의의 승리로 파악하는 관점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에겐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라는 빌 클린턴의 대선 구호로 유명한, 지금은 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가 된 경제학자 폴 로머가 정식화시킨 1990년대 ‘신경제’ ‘지식경제’ 개념이다. ‘제3의 길’은, 사민주의와 신경제의 복합체다.

저자는 블레어보다는 훨씬 좌파적이라 평가받던 신노동당의 이데올로그이자 재무장관과 총리를 역임한 고든 브라운의 아이디어를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데, 이런 책 내용과 별도로 멀리 갈 것 없이 우리의 외환위기 이후를 떠올려보면 된다. 김대중 정부 때 심형래가 신지식인1호로 선정되고 교육부가 교육’인적자원’부가 되고 ‘생산적 복지’ 개념이 등장하고, 노무현 정권 때 ‘사회투자국가’라는 말이 나오는 게 모두 제3의 길 맥락 아래 있다. 짧게 말하자면 이제 무형의 지식 그 자체가 중요해진 신경제 혹은 지식경제 시대는 자신의 창조력과 경쟁력을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자소서형 인간’과 ‘스펙형 인간’을 만들어냈다. 이들을 위해 ‘사회적 투자’를 한다는 건, 성공만을 지향한다는 얘기다. 투자란 성공을 위한 것이지 “좋은 시도였어”라고 낭비하기 위한 게 아니다. 이런 이상형에 딱 들어맞는 개인은 저마다의 재능과 능력을 꽃피우기 위해 단 1초도 낭비하지 않는 ‘기업가적 시민’이다. 그 결과는? 보다시피 ‘헬조선’이라는 아우성이다. 좌파임을 자임하는 이들이 김대중ㆍ노무현 정권 시절을 “신자유주의이긴 매한가지”라고 호되게 비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스웨덴 사민당이라고 달랐을까? 저자가 보기에 1930년대부터 스웨덴 모델은 여러 사민주의 모델 가운데 가장 시장친화적이었다. 경제위기 등이 닥쳤을 때 노동조합총연맹을 “기득권”이라 규정하고 사회적 낙오자들을 “생각없는 자”라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기도 했다. 교육 문제에 ‘인적 자원’이란 표현을 쓴 문제 따윈 차라리 가소롭다. 스웨덴 사민당은 1930년대부터 아예 인간 ‘소재(material)’라는 표현을 썼다.

우리가 그렇게 부러워하는 보편적 복지제도의 출발점에 깔려 있는 건 아주 노골적인 “인간의 양과 질에 대한 주목”이었다. 당신은 부품, 그것도 아주 우수한 부품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렇기에 우생학과 인종주의는 스웨덴 사민당의 ‘어두운 면’이다. 보편적 복지는 이 어두운 면을 거론하는 것조차 어렵게 한다. 저자는 “스웨덴에서는 사회적 배제가 뚜렷한 인종적 차원을 띄고 있는 반면, 스웨덴 사회민주주의는 구조적 차별 관념을 매우 불편해 한다”고 꼬집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웨덴 사민당에게 배워야 할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건 ‘도서관과 작업장’이라는 제목이다. 영국처럼 지식과 창조성은 작업장에서 발휘되어야 하는 것이라 할 게 아니라 스웨덴처럼 지식과 창조성은 도서관에서 함양되어야 한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반전은 하나 더. 참 좋은 이 논의는 결국 생산과 노동의 영역이다. 지식경제를 넘어,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AI)가 거론되는 지금은 어떨까. 번역자 장석준은 해제에서 ‘자유시간의 확대’를 조심스레 꺼내 든다. 그러니까 이런 얘기다. 지난 대선 심상정 정의당 후보가 ‘노동’을 거듭 강조하자, 철학자 김재인은 “노동 자체는 싫어야 정상 아닌가. 이상주의자로서 나는 노동의 이상을 부정한다”고 되받아쳤다. 사민주의의 다음 과제는 ‘놀이’가 될 지도 모르겠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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