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논란을 끝내고 영화를 즐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영화계의 ‘뜨거운 감자’가 된 영화 ‘옥자’의 극장ㆍ온라인 동시 개봉 문제에 “극장 측의 (보이콧)입장을 존중한다”고 밝히며 “(개봉관은) 적지만 길게 관객을 만날 수 있길 바란다”고 기대했다.
14일 서울 신문로의 한 호텔에서 열린 ‘옥자’ 기자회견에서 참석한 봉 감독은 “이번 논란으로 인해 영화계에 새로운 규칙들이 생겨나고 있다”며 “영화 외적으로 그런 부분에 기여할 수 있다면 이 또한 복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세계 최대 동영상 스트리밍업체 넷플릭스가 제작한 ‘옥자’는 극장 온라인 동시 개봉을 추진하고 있어, ‘선 극장 개봉ㆍ후 온라인 공개’ 원칙을 요구하는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등 국내 멀티플렉스 체인들과 갈등을 빚고 있다.
봉 감독은 “‘옥자’는 전 세계 넷플릭스 가입자들의 회비로 만들어진 영화”라며 “극장 관객을 위해 넷플릭스 가입자들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아울러 “이번 논란은 영화를 큰 스크린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면 좋겠다는 개인적 욕심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며 양해를 구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봉 감독을 비롯해 주연배우 틸다 스윈턴과 안서현, 변희봉, 스티븐 연, 다니엘 헨셜, 지안카를로 에스포지토 등이 참석했다. 배우들은 “옥자를 고향에 데려왔다”며 한국 방문에 한껏 설렌 모습이었다.
‘옥자’는 글로벌 기업에 납치당한 유전자 변형 슈퍼돼지 옥자를 구하려는 산골소녀 미자(안서현)의 모험을 그리며 자본주의의 탐욕과 비인간성을 고발한다. 29일 개인 극장 100여곳과 넷플릭스에서 동시 공개된다. 다음은 일문일답.
-온라인 업체가 만든 영화라 칸국제영화제에서 프랑스극장협회의 반발을 샀고 한국에서도 개봉 상황이 여의치 않은데.
봉준호 감독(봉)=“가는 곳마다 논란을 몰고 다니고 있는데, 이 논란을 통해 새로운 규칙들이 생겨나고 있다. 칸에서도 넷플릭스 영화를 앞으로 어떻게 다룰지 규정 새로 생겼다. 우리 영화가 영화 외적으로 그런 기여를 할 수 있다면 이 또한 복이 아닌가 싶다. 칸에서는 우리를 초청하기 전에 법적으로 미리 정리가 됐더라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이미 초청된 상황에서 논란이 되니까 좀 민망했다. 그리고 엄연히 국제영화제인데 왜 프랑스 국내법을 관철시키려 했는지 의아하다. 그래도 우리가 영화제 초반 분위기를 달구는 데 공헌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상황이 좀 다르다. 멀티플렉스 극장들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한다. 3주간 홀드백(극장 상영 영화가 다른 플랫폼으로 이동하는 기간)을 원하고 있는데 극장주 입장에선 당연한 주장이다. 반면 넷플릭스의 동시 개봉 원칙도 존중 받아야 한다. ‘옥자’는 넷플릭스 가입자들의 회비로 만들어진 영화인데 극장 관객들을 위해 가입자들에게 기다리라고 할 수는 없다.
저의 영화 적인 욕심 때문에 이번 논란이 생겼다. 넷플릭스 영화가 극장 개봉을 강행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옥자가 특이한 경우다. 이 영화를 사람들이 큰 화면에서 보면 좋겠다는 생각에 극장에서 개봉하길 원했다. 국내 배급사도 그런 취지에 공감했기에 진행한 건데 현실적으로 제도와 법이 미비해서 벌어진 일이라 본다. 규칙이 생기기 전에 영화가 먼저 도착한 것 같다. ‘옥자’가 스트리밍 영화와 극장 영화에 대한 업계의 규칙을 정비하는 데 신호탄이 되길 기대한다. 아울러 이 논란에 본의 아니게 휘말려 피곤하셨을 업계 관계자들께 죄송하다. 품질 좋은 스트리밍과 큰 스크린에서 둘 다 보여주고 싶은 욕심은 아직 갖고 있다. 대한극장 서울극장 등 한동안 잊고 지냈던 정겨운 극장들을 찾아볼 수 있는 기회다. 지금 상황도 만족스럽다. 작지만 길게 만날 수 있길 바란다.”
-영화 준비하면서 채식주의자가 됐다고.
봉=“돼지고기는 안 먹게 됐다. 하지만 타인의 시선이 없는 곳에서 닭고기와 소고기 등을 가끔씩 먹고 있다(웃음). 점점 붉은 고기는 안 먹고 치즈와 유제품, 달걀, 해산물만 먹게 되더라. 실제로 두 달간 비건(Veganㆍ고기는 물론 우유와 달걀도 먹지 않는 채식주의) 생활을 한 적이 있다. 2015년 초에 시나리오 쓰던 중 미국 콜로라도주의 도살장을 방문한 적 있다. 하루에 5,000마리 이상 소를 도살하는 곳이었다. 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도살장 시퀀스가 충격적이라고들 하는데, 실제로 본 건 영화보다 30배는 더하다. 피와 배설물 등이 뒤섞인 냄새가 압도적이었다. 뉴욕으로 돌아가서까지 옷에서 그 냄새가 나는 것 같은 환각이 느껴질 정도였다. 철학적 결단이 아니라 그 냄새 때문에 고기를 못 먹게 됐다. 그러나 서울에 돌아오니 평소 생활로 자연스럽게 돌아왔다. 이 영화가 사람들에게 비건이 돼야 한다고 강요하진 않는다. 자연 세계에선 동물도 동물을 먹는다. 자연의 흐름 안에서 육식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동물을 공장 대량생산의 일부분으로 만든 것이 문제다. 결국 돈 때문이다. 공장식 축산에 대해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는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다.”
-글로벌 프로젝트로 문화권을 넘나드는 데 어려움은 없나.
봉=“이 영화로 문화적 경계를 넘어 보겠다는 의도는 없었다. 스토리에 충실할 뿐이다. ‘설국열차’에선 인류의 생존자를 다루니 다양한 출신의 캐릭터가 있어야 했고, ‘옥자’는 다국적 거대 기업에 대한 얘기라 여러 나라 배우들이 나오고 스태프가 섞이게 됐다. 작업 과정에서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다. 영화 만드는 매커니즘은 어디나 비슷하다. ‘괴물’ 때도 호주와 뉴질랜드의 특수효과ㆍ시각효과 팀과 같이 일했고, 일본에서 옴니버스 영화를 찍은 적도 있다. 이런 작업 방식엔 적응됐다. 주변에 좋은 통역자들도 많아 도움을 받는다. 언어는 큰 문제가 아니다. 같은 한국말 하는 배우여도 마음 안 맞으면 더 힘들다. 전 세계는 이미 문화적으로 국경이 붕괴돼 있다.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다양한 문화가 충돌하고 뒤섞여 있다.”
-‘괴물’도 ‘옥자’도 누군가를 지키려는 소녀가 주인공인 이유는.
봉=“소년보다 소녀들이 강인할 때 아름답게 느껴진다. 미자 역을 맡은 안서현도 시나리오를 보더니 그 사실을 빠르게 간파하고는 ‘제가 옥자의 보호자이군요’라고 하더라. 덩치가 몇 배 큰 옥자를 지켜주는 존재다. 누구도 미자를 막을 수 없다. 틸다 스윈턴이 연기한 글로벌 기업 미란도의 CEO도, 미자도, 그리고 옥자도 여자다. 옥자가 여자로서 겪게 되는 혹독한 상황도 나온다.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진 않았지만 스토리를 엮어가면서 옥자와 미자와 미란도로 이어지는 축이 아주 자연스럽게 여성으로 구성됐다.”
-옥자는 어떤 이미지로 디자인했나
봉=“외모는 돼지, 하마, 코끼리 그리고 미국 플로리다주에 사는 매너티라는 동물을 참고했다. ‘괴물’을 디자인했던 장희철씨와 함께 작업했다. 네 가지 동물을 섞어서 표현했는데도 ‘슈퍼하마’나 ‘슈퍼코끼리’가 아니라 ‘슈퍼돼지’를 내세운 건 영화가 식품 산업을 소재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돼지는 섬세하고 똑똑하고 청결한 동물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돼지를 보며 어떻게 먹을지 생각한다. 돼지에겐 비극이다. 그 자체로 아름다운 동물이면서 식품으로 처리되는 이중적 운명을 보여주기에 돼지만큼 좋은 존재가 없다고 본다.”
-감독과 배우 각자가 생각하는 ‘옥자’의 메시지는.
안서현=“지구의 식량난 때문에 옥자가 만들어지고 끌려간다. 지구에도 곧 식량난이 벌어질 텐데 우리 힘으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메시지와 의미를 담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틸다 스윈턴=“이 영화는 옥자와 미자의 성장 영화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현실을 견뎌내고 집으로 돌아간다. 믿음과 사랑, 진정한 자아를 지켜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스티븐 연=“나에게 ‘옥자’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얘기하는 영화다. 이야기가 자연에서 시작해 자연에서 끝난다. 특히 여주인공이 험난한 여정을 헤쳐나가는 모습에 주목해주길 바란다.”
다니엘 헨셜=“’옥자’는 인류의 희망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에 어두운 곳이 많은데 이 영화를 보면서 희망을 갖게 된다. 사람들이 어둠보다 빛을 선택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지안카를로 에스포지토=“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사랑할 수 있다면 미자처럼 그 사랑을 타인과도 공유할 수 있다. ‘옥자’는 용기와 헌신과 신뢰에 대한 영화다.”
봉=“우리 시대가 주는 피로감이 있다.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시대 아닌가. 그럼에도 우리가 파괴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미자와 옥자가 보여주고 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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