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임루프ㆍ타임슬립 등 시간을 변주한 판타지는 이제 또 하나의 장르라고 할 정도로 보편적인 소재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엣지 오브 투모로우’ ‘소스코드’ 외에도 최근 개봉한 ‘7번째 내가 죽던 날’까지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일반적으로 타임루프 영화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인생에 왜 이런 황당한 사건이 일어났는지 크게 궁금해 하지 않는다. 우선 이 설정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대신 남들과 다른 특별한 능력을 활용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주인공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타임루프를 이용해 구해내는데 성공할 것이고, 그 사이에서 고군분투할 것이다. 이런 내용은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에 보지 않아도 뻔할 수밖에 없다.
이 가운데 타임루프 소재의 한국 영화 ‘하루’의 등장은 별반 기대될 것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기 전 2시간을 계속 반복하는 두 남자가 등장한다는 설정은 한국영화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부성애 연기와 눈물 쏙 빼는 전개를 예상케 하기 때문이다.
처음엔 ‘하루’ 역시 반복되는 하루를 통해 죽은 가족들을 다시 살려내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하루’의 인물들은 왜 자신들에게만 하루가 반복되는지 끊임없이 질문한다. 그리고 주인공들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내면서 타임루프를 통해 감독이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전달된다. 결국 ‘하루’는 단순한 가족애를 뛰어넘는다.
먼저 ‘하루’는 러닝타임 90분으로 스피드한 전개를 펼친다. 이것저것 밑밥을 깔거나 돌아가지 않고 시작 5분 만에 주인공들의 사랑하는 딸과 아내가 죽는다. 그리고 타임루프 설정에 충실하게 그 상황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군더더기 없이 본진으로 돌진하는 신인 감독 조선호 감독의 과감함이 돋보인다.

잠에서 깨는 시간부터 하루가 끝나는 시간은 겨우 두 시간 남짓이다. 반복되는 구간이 굉장히 짧기 때문에 바꿀만한 요소가 없다는 것이 이 영화를 끌고 가는데 가장 큰 어려움일 것이다. 하지만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동안 배우들은 끊임없이 다른 감정을 보여준다. 남들이 보기엔 같은 날이지만 이들은 매일 다른 하루를 사는 것이다. 처음엔 당혹스러움, 두 번째엔 꼭 구해야겠다는 다짐, 다음엔 해결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 이후엔 그럼에도 바꾸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무기력함까지, 배우들의 감정이 어디까지 흘러갈 것인지 보는 것은 극의 중요 흥미 포인트다.
게다가 조선호 감독은 똑같은 소재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다른 플롯으로 풀어낼 줄 안다. 비슷한 내용을 다르게 보이게 하는 힘, 이것이 영화가 가진 힘이자 연출자의 능력 아닐까. ‘하루’는 영화 ‘아가씨’처럼 3개의 시선이 존재한다. 준영(김명민 분)이 이야기를 꺼내면 민철(변요한 분)이 살을 조금 더 덧붙여 사건이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 의문의 남자 강식(유재명 분)이 등장하는 순간 관객들은 이 영화와 다른 영화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시퀀스만으로도 유재명은 극의 중심으로 치고 들어오며, ‘하루’는 영화로서 자신의 몫을 다한다.
세 사람이 모두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조각처럼 끼워 맞춰짐과 동시에 딜레마에 빠진다. ‘너라면 어떻게 할래?’라는 어려운 질문에 등장인물들은 서로 다른 답을 내리고, 관객들마저 그 누구에게도 ‘당신이 틀렸다’라고 비난할 수 없게 된다. 등장인물 한 명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가 하나의 세상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투이기에 영화는 더 몰입감이 생긴다. 그리고 이 딜레마를 통해 관객들은 이해와 관용의 미덕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하루’는 가해자를 완전히 용서하는 것과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고백하는 것이 다르지 않음을, 그리고 복수에 가득 찬 사람과 용서받고 싶은 사람이 어떻게 손을 잡는지에 대해 이야기 하는 영화다. 오는 15일 개봉.
이주희 기자 leej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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