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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폰 보라, 루터의 아내

입력
2017.06.1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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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6.13

카타리나 폰 보라의 초상화. 독일 르네상스 화가 루카스 크랜치 디 엘더의 1550년 유화.
카타리나 폰 보라의 초상화. 독일 르네상스 화가 루카스 크랜치 디 엘더의 1550년 유화.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1525년 6월 13일 결혼했다. 독일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건 지 8년 만이었고, 당시 그는 교회 개혁의 상징적ㆍ실질적 지도자로 유럽 전체가 주시하는 존재였다. 결혼 역시 교황청에 대한 도발이자, 성서 중심의 신앙적 가치를 부각하는 시위적 성격이 강했다. 독신 서원을 한 41세의 수도사 루터가 아내로 맞은 여성은 26세의 전직 수녀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 1499~1552)였다.

폰 보라의 생년과 출생지는 불확실하지만, 리벤도르프의 쇠락한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5살에 베네딕트수녀회에 맡겨졌고, 9살 무렵 님브센의 시토수녀회로 옮겨져 교육을 받았다. 16세에 종신서원을 하고 수녀가 됐다. 2년 뒤 종교개혁 운동이 시작됐다.

그의 수녀회는 물론 교황청 영향력이 절대적이던 구교 권역이었다. 개혁운동에 영향을 받은 폰 보라는 동료 수녀 11명과 함께 루터에게 도움을 청했고, 루터의 주선으로 1523년 청어 운반용 통에 숨어 비텐베르크로 탈출했다. 오갈 데 없던 그들은 개혁파 종교인들의 주선으로 결혼도 하고, 가정교사로 취직도 하고, 교회 일을 거들기도 했다.

카타리나도 여러 차례 결혼 제안을 받았지만, 그는 루터나 동료 개혁가 니콜라우스 폰 암스도르프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공언하며 버텼다. 상세한 사정 역시 알려진 바 없지만 어쨌건 둘은 결혼했고, 지역 제후(프리드리히 현공)가 결혼 선물로 준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신접 살림을 차렸다.

카타리나는 가난한 수도원 살림을 맡아 농사 등을 지으며 자녀 6남매와 양자 4명을 길렀고, 수도원에서 기숙하던 루터의 제자 10여 명을 거두었다. 냉혹한 전사의 기질을 타고난 것으로 알려진 루터였지만, 그가 종교적으로, 정서적으로 기댄 유일한 존재가 카타리나였다. 루터가 지인들에게 보낸 서신 등에서 카타리나를 ‘My Lord’라 칭한 적도 있었다. “나는 캐티(Katie)를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한다. 만약 그녀가 아이들과 더불어 죽어야 한다면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이다”라고 쓸 때도 있었지만 “내가 악마와의 싸움을 견딜 수 있다면, 캐티의 짜증도 견딜 수 있겠지”라고 쓸 때도, 물론 있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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