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구, 오랜만입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노무현입니다’를 만든 이창재 감독과 제작자 최낙용 PD는 뜻밖의 인사로 마주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관객들을 만나러 다니느라 정작 두 사람은 얼굴 못 본 지 오래라고 했다. “주연배우가 없으니 저희가 뛰어야죠.” 다큐멘터리에 주연배우가 없는 게 당연한데도 이 감독의 얘기가 다른 의미로 아프게 들렸다.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인 이 감독의 연구실에서 9일 두 사람을 만나 못 다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 연구실과 그 옆방에서 영화 편집 작업을 했다고 한다.
‘노무현입니다’는 두 사람의 세 번째 협업이다. 최 PD가 부사장으로 재직 중인 영화사 백두대간이 2012년 이 감독의 연출작 ‘길 위에서’를 배급하며 처음 인연을 맺었다. 2014년 ‘목숨’에는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노무현입니다’는 그 해 부산국제영화제 뒤풀이 자리에서 이 감독이 처음 제작 계획을 꺼내놓으며 시작됐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미뤄지던 프로젝트는 지난해 4ㆍ13 총선 이후 급물살을 탔다. 여소야대로 나타난 출구조사 결과를 확인한 최 PD가 “할 수 있겠다”며 이 감독에게 연락을 했다. “독립영화계 후배들을 만나면 왜 ‘노무현 다큐’ 안 만드냐고 묻곤 했어요. 다들 잠잠하니 오기가 생기더군요. 아무도 안 만들면 나라도 만들어야겠다 싶어 나섰죠.”(이 감독)
부산의 술자리에 동석했던 한 인사가 그 즈음 연락을 해왔다. 그 프로젝트가 실제 진행된다는 걸 모르고 “혹시 노무현 다큐를 만든다면 투자하고 싶다”고 했다. 첫 투자자였다.
소송ㆍ세무조사도 대비
제작 과정은 첩보 작전을 방불케 했다. 그야말로 “몰래 만든 영화”였다. ‘노무현’을 입에 올리는 순간 불이익을 각오해야 했다. 최 PD는 백두대간에 피해가 갈까 우려해 영화사 풀을 따로 차렸다. 내용이 알려지면 안 돼 가제는 ‘N프로젝트’. 극우단체의 고소ㆍ고발과 세무조사에도 대비했다. 개인 투자자들은 배우자 이름으로 참여했다. 그렇게 모은 돈이 2억원. 이후 크라우드 펀딩으로 2억원을 더 모았다. 이 감독은 “학교를 그만둬야 할지도 모른다”는 얘기까지 들었다. 하지만 이 영화만의 특수한 상황은 아니었다. 최 PD는 “개봉이 어려우면 온라인에 올려놓고 잠적할 생각이었다”며 “촛불 시민들께 감사하다”고 말했다.
한때 극장 상영이 불가능하리라 여겨졌던 영화는 개봉 열흘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하고 11일 150만 고지도 가볍게 넘었다. 다큐멘터리로는 이례적 흥행이다. 마케팅비를 포함해 6억원이 들어간 ‘노무현입니다’의 극장 매출액은 11일 기준 123억7,524만원(영화진흥위원회 집계)이다. 이 감독은 “엄청난 후폭풍을 예상하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도 닫아놨는데 부정적 반응이 없는 걸 보고 노 전 대통령의 공감능력을 새삼 느꼈다”고 말했다. 최 PD는 “노 전 대통령과 깊은 인연을 가진 분들이 지난 시간을 대면할 용기가 안 난다면서 영화 관람을 미루고 있더라”며 “빨리 극장으로 오시라”고 웃음 지었다.
영화는 2002년 새천년민주당 국민참여경선에서 지지율 2% 꼴찌후보 노무현이 이인제 대세론을 뒤집고 대통령 후보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다룬다. 변화에 대한 열망이 ‘노무현 돌풍’이 되어 한국 사회를 달구던 시기였다. “정치 지도자 중심의 계파 구도에선 민의가 사라져 버려요. 그런데 그 경선에 계파도 없는 노무현이란 사람이 등장했고 그 뒤로 시민들이 따라 나섰잖아요. 시민과 시민의 대표라는 정치적 이상이 우리 역사에서 딱 한 번 실현된 거죠. 그 경선이 현대 정치사에서 아주 중요한 변곡점이라 판단했습니다.”(이 감독)
문대통령 인터뷰 내내 글썽
제작진은 7~8개월간 자료 수집에 매달렸다. 72명을 만나 문재인 대통령과 안희정 충남지사, 유시민 작가 등 39명의 인터뷰를 영화에 담았다. 하나같이 눈물을 쏟아서 편집에 애를 먹었다. 문 대통령 인터뷰도 많이 잘렸다. “본래 성품처럼 인터뷰도 정돈된 모습이셨어요. 그런데 편집 과정에서 보니 내내 눈물을 글썽거리고 계시더군요.”(이 감독) 영화엔 담기지 못한 에피소드도 있다. 1997년 대선에 나가겠다는 노 전 대통령을 말리지 못해 참모들이 문 대통령을 서울로 불렀다. 문 대통령에게도 “부산 내려가소”라며 호통쳤지만 노 전 대통령은 결국 결심을 접었다. 이 감독과 최 PD는 “‘문재인 친구 노무현’이라는 말을 실감했다”고 입을 모았다.
영화는 관객을 울리지만 화법은 극도로 절제돼 있다. “눈물은 카타르시스를 주죠. 그러면 말끔하게 잊어버리게 되고요. 카타르시스에 가까이 가되 감정을 해소하는 영화가 돼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이 감독) 인터뷰이를 ‘면 대 면’으로 포착한 것도 “관객과의 정서적 교감”을 위해서였다.
영화를 만들며 가깝게 만난 노 전 대통령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분에게서 정직을 배우고 싶어요. 말을 행동으로 지키려 노력하셨어요. 개인의 삶에서도 그러기 힘든데 공적으로도 그 신념을 지키려 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최 PD)
영화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인파 속을 걷는 노 전 대통령의 뒷모습에서 끝난다. 영상을 처음 본 순간부터 “누가 이 영화를 위해 찍어뒀나 보다”라고 감탄한 장면이다. 제목도 이 장면에서 나왔다. “인터뷰 중에 ‘그때 우리 모두가 노무현이었다’는 말이 나와요. 노무현과 시민은 혼연일체였죠. ‘노무현입니다’는 변화의 열망을 희망으로 바꿔낸 시대정신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최 PD)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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