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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한 권력 끊어낸 시민의 힘, 촛불혁명 바탕 됐다”

입력
2017.06.10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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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이한열… 화려한 승리보단 슬픈 기억

독재정권 타도 급급, 새로운 정치 고민 부족

대선 통한 정권교체, 민주주의 분명히 정착

이제는 진영논리 대신 협치로 문제 풀어야

5일 우상호(왼쪽부터) 더불어민주당 의원,정태근 전 의원,이남주 성공회대 교수,이태호 참여연대 정책위의장이 6월 항쟁 당시를 회상하며 대화 하고 있다. 고영권기자youngkoh@hankookilbo.com
5일 우상호(왼쪽부터) 더불어민주당 의원,정태근 전 의원,이남주 성공회대 교수,이태호 참여연대 정책위의장이 6월 항쟁 당시를 회상하며 대화 하고 있다. 고영권기자youngkoh@hankookilbo.com

현직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촛불집회가 지난 4월 29일 23차 집회를 마지막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촛불집회의 저력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장대한 민주화의 흐름 속에 각인되어 왔던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뿌리 깊은 정신의 발현이었다. 그 근원은 30년 전 6월항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7년 6월 10일 시작돼 6월 29일까지 전국에서 이어진 항쟁은 전두환 정권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대항 논리’에 매몰돼 국정 운영의 로드맵을 계획하지 못했던 한계도 분명했다. 결국 그 해 12월 대선에서 패배했고 책임공방을 펼치다 분열했다. 이후 97년 외환위기 사태 이후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민주화가 밥 먹여주지 않는다’는 부정적 공감대가 형성됐고,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양상마저 보였다. 하지만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지키고야 말겠다던 결의는 지난해 광화문광장에서 촛불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되살아났다. 그런 점에서 흔히 ‘미완의 혁명’이라는 평가를 받아 온 6월항쟁이 30주년을 맞는 지금 어느 때보다 항쟁의 의미는 새롭다.

6월항쟁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이고,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계승되어야 하는가. 이 화두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30년 전 “호헌철폐, 독재정권 타도”를 목놓아 외쳤던 항쟁의 주역들이 5일 서울광장에 다시 모였다. 지금은 서로 다른 정치적 공간에서 활동 중인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전 원내대표, 정태근 전 한나라당 의원, 이남주 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 이태호 참여연대 정책위원장은 지난해 광화문광장의 촛불혁명에서 6월항쟁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봤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이어진 좌담회는 80년대 야권 인사들이 기자회견 장소로 즐겨 찾았던 정동레스토랑이 있던 자리인 서울광장 인근 달개비에서 진행됐다.

30년 전 6월항쟁의 기억

이남주=87년 6월항쟁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지 각자 인상에 남는 장면들을 꼽아 달라.

우상호=항쟁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저에게는 두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먼저 87년 6월 9일 이한열군이 6ㆍ10 국민대회 하루 전 출정식에서 쓰러져 제가 병원을 지키고 있는 장면이다. 이로 인해 6월항쟁은 저에게 화려한 승리가 아니라 누군가 나를 대신해 쓰러졌다는 슬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다음날인 6월 10일 오후 7시쯤 서울 중구 신세계 백화점 앞 분수대 인근을 가득 메운 군중들의 모습도 오랫동안 잊을 수 없다. 그 전에는 많아야 1,000~2,000명 수준이었는데 1만명이 넘는 대열이 집결했다. 그때 이 투쟁은 승리하겠구나 직감했다.

정태근=저에게는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다. 6월항쟁 당시 저는 홍성교도소에 갇혀 있었다. 86년 연세대 총학생회장으로 활동하다가 구속돼 18개월째였다. 종철이는 성동구치소에 구속돼 있을 때 처음 만났다. 종철이 아버님께서 종철이가 데모를 안 했으면 하는 생각에 책도 안 보내줘서 제가 옆방에서 책도 가져다 주고 그랬다. 그 뒤 저는 안양교도소로 이감됐는데 87년 1월 종철이가 고문으로 숨졌다는 얘기를 듣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이태호=저는 6월항쟁 당시에 대학 2학년이었는데 데모하는 사람들이 꽤 좋은 일을 하고 있구나 정도로만 생각할 정도로 운동권과 비운동권 사이에서 헤맸던 시절이다. 그랬던 저에게 6월항쟁은 역시 단과대 선배였던 박종철 열사로 기억된다. 당시 운동권도 아닌 제가 데모에 나가기로 결심한 계기도 박 선배의 죽음이었다.

우상호=이런 사람들을 6월항쟁 세대라고 한다. 뒤늦게 인생 꼬인 사람들.(웃음)

이태호=제가 뒤늦게 항쟁에 참여하는 바람에 지금까지 늦깎이로 사회운동을 하고 있다.(웃음)

정태근=부연하자면 80년대 초반부터 6월항쟁까지 시위에 대해 알고 참여했든 모르고 참여했든 2030세대에서 이념 좌표와 관계없이 민주화에 대한 공감도가 대단히 높았다. 학력이나 지역과 상관없이 상당히 높은 수준의 공감대를 갖고 사회행동으로 연결시켰다. 그 뒤의 분열 과정을 제외한다면 상당히 행복한 세대였다.

이남주=저는 두 가지 기억이 항상 새롭다.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저는 6월 10일 수배 등의 이유로 학생회 간부들과 학교에 남아 있었는데 시위에 국민들의 호응이 높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가 뭉클했던 장면이 생각난다. 다음날 아침 농성이 진행되던 명동성당에 학생들이 가세하도록 했고, 이후 명동성당이 근거지가 되어 6월항쟁으로 상황이 진전됐다. 다른 하나는 6월 18일 교내 집회에 거의 모든 학생이 참여했던 장면이다. 모두가 하나가 됐던 그때의 기억이 참 오래 남아 있다.

정태근=다른 한편으로는 6ㆍ29 선언이 나왔는데도 상당히 불안했던 기억도 남아 있다. 당시 시국사범이 석방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1,000여명 가운데 300명 정도밖에 못나왔다. 그때 김근태, 이부영, 장기표 선배 등 재야운동의 상징적 지도자들이 못 나오고 다 감옥에 있었다. 속으로 ‘아 이게 끝난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

우상호=저도 6ㆍ29 선언 나오고 8월쯤 이한열 열사를 숨지게 한 경찰들에 대한 무혐의 처분에 항의하러 경찰청에 갔다가 붙잡혀 이후에는 감옥에 있었다. 그러다 대선에서 민주 진영이 이길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었는데 졌다는 얘기를 듣고 나선 한 3일 동안 감옥이 적막했던 기억이 난다. 6월항쟁이 엄청난 항쟁인줄 알았는데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니까 내부에서 책임 논쟁이 시작돼 운동 진영이 아주 심각하게 무너졌다.

6월항쟁에 대한 평가

이남주=자연스럽게 6월항쟁에 대한 평가로 이야기가 모아지는 것 같다. 6월항쟁만으로 해갈되지 않고 남은 것들이 있었다. 6월항쟁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나.

우상호=그동안 6월항쟁을 미완의 항쟁이라고 평가해 온 이유가 직선제 개헌을 관철했지만 궁극적 목표인 민주정부 수립에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6월 광장에서 이기고 12월 대선에선 졌다. 두 번째로 민주주의 확보에만 집중하다 보니까 그 이후의 개혁과제들을 정식화해서 국가 전체의 과제로 만드는 데는 성공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대선에서 지고 항쟁에 참여했던 시민ㆍ학생ㆍ재야는 책임 소재를 놓고 20년 동안 분열했다. 다만 강고했던 독재정권의 장기집권을 끊어내는 시민항쟁으로서는 평가받을 만하다.

정태근=기본적으로 80년 5월 광주로부터 시작된 민주화의 여정이 87년 6월항쟁으로 결실을 맺은 것이라고 평가한다. 6월항쟁을 통해서 국민이 원하지 않는 권력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다만 중기적ㆍ장기적 방향과 과제에 대한 고민의 부재가 변화를 더디게 했던 것은 분명하다.

이태호=물론 6월항쟁 이후에 ‘이게 뭐지’ 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데모는 열심히 했는데 결국은 직전 군부 세력이 다 가져갔다는 평가도 내부에서 나왔고. 하지만 6월항쟁으로 우리 사회에 시민의 권리가 의제화되고 제도화되는 계기가 됐다. 또 대선 패배 후 노동조합운동이 시작됐고 여성단체연합,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 주요 시민단체들이 탄생했다. 이번 촛불정국을 겪으면서 촛불이 일어날 수 있는 기본적 바탕을 만든 것이 6월항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남주=6월항쟁이 미완의 혁명으로 그친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우상호=제가 당시에 지도부였으니 감히 평가하자면 우리의 준비가 그 정도였다. 당시 학생운동은 정치권과 분리돼 있었다. 재야와 정치권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만들어서 연대했지만 학생은 과격 시위로 이미지가 안 좋아 껴주지 않았다. 요약하면 연대의 수준이 모든 정치권, 재야, 학생, 시민들을 망라한 건 아니었다.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여서 어떻게 할 건지 논의도 개헌 이후에 시작했다. 청사진이 없는 게 한계였지만 그렇다고 그럴 역량을 만들 수도 없었던 상황이었다. 사실 항쟁을 이어나가는 것도 급급했다. 5월 광주 항쟁 이후에 그렇게 장기적인 시위를 조직한 경험이 부족했다.

정태근=우상호 선배 말처럼 당시에 민주화를 이루고자 했던 시민사회, 학생, 심지어 정치권조차도 부정한 정권을 넘어뜨리는 데 급급해 새로운 정치를 제도화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큰 고민이 없었다. 실제로 1988년 총선에서 선거법 협상을 하는 데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문제가 많다고 지적되는 소선거구제가 그때 만들어진다. 그 당시 민정당은 중선거구제를 원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민당과 민중의당에서는 소선거구제를 주장했다. 이처럼 당시에는 정치에 대한 이해나 변화과정, 정치의 기능에 대한 공부도 안 됐고 고민도 못했다.

이태호=시민사회도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던 웃긴 농성을 한 적이 있다. 87년 대선 직전에 후보 단일화를 압박하겠다고 양쪽 당사에서 농성을 하다가 명동성당으로 달려가 김수환 추기경한테 양김씨(김대중ㆍ김영삼)가 단일화 협상장에 나오게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김 추기경도 못한다고 하니까 우리가 거기서 석고대죄를 하며 농성을 했다.(웃음) 그때 시민사회가 성장하기도 했지만 독재 이후를 고려할 수 있는 자력화된 시민은 적었다. 그게 한계였다.

우상호=대선 패배를 경험하면서 정치 세력화 논의도 나오기 시작했다. 운동권 입장에서는 시쳇말로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번다는 얘기가 나왔다. 그 이전에는 정치권에 가면 변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6월항쟁을 겪으면서 정치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밖에서 항쟁을 해도 늘 같은 결과가 나타난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 그러면서 6월항쟁의 평가를 두고 기존 제도권 정당에 들어가 주류가 되자는 흐름과 독자적 정치 세력화를 꿈꿨던 진보정당 흐름이 갈리게 된다.

6월항쟁 이후 한국 사회 평가

이남주=지난 30년간 한국 사회에 6월항쟁의 정신이 얼마나 뿌리 내렸다고 평가하나. 저는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못했다고 본다. 첫 번째는 남북관계다. 남북관계를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서 사람들의 시각이 다 다르겠지만 이렇게 남북관계가 악화된 조건에서는 사회가 정상적으로 발전하는 데 제약이 따른다. 남북관계를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바꾸지 못했다. 두 번째는 양극화와 같은 경제적 문제다. 일하는 사람들의 위치가 점차 악화되고 이게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적 생각들을 만들었다. 이 두 가지가 해결되지 않으면 촛불 이후에도 우리가 나갈 수 있는 진전에 한계가 있다.

우상호=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에 따르면 군부 독재를 경험한 나라가 두 번의 정권교체를 겪을 때 민주주의가 정착된 사회로 평가한다. 우리는 이미 10년(노태우ㆍ김영삼)ㆍ10년(김대중ㆍ노무현)ㆍ10년(이명박ㆍ박근혜 정부)을 지나 이번에 문재인 대통령이 됐다. 각각의 정권의 잘잘못을 떠나서 6월항쟁으로 확립된 ‘대선을 통한 정권교체’라는 민주주의 본연의 과제는 정착되고 있다고 본다. 다만 박근혜 정부 때 사적 권력을 쥔 소수 엘리트들의 이해관계만을 중시하면서 민주주의가 퇴행했다. 하지만 민주정부를 주장했던 사람들도 결국 빈부격차 문제와 한반도 평화를 공고화 하지 못해 지금의 시대과제로 다시금 나타난 것은 반성적으로 되짚어볼 대목이다.

이태호=저도 비슷하게 생각한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이라는 말이 있듯이 6월항쟁 이후 정권교체 과정을 보면 아무리 절망적으로 평가해도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과정으로서 긍정적으로 높게 평가할 만하다. 다만 권력교체를 하면서 실제로 어떤 상태를 진전시켰는지 평가하면 불만족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특히 97년 외환위기 이후 경제적 정의가 후퇴하면서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빨리 민주화됐지만 동시에 양극화 되고 있다. 분단체제의 뒤끝이라고 할 만한 꼬리표 붙이기 식의 이념갈등도 심각하다. 시민 대다수가 불안에 떨고 있다. 예전에는 패자부활이 제도적으로 안 되더라도 성장이 되면 패자부활이 됐다. 그런데 지금은 고도성장이 불가능한 게 자명하다. 패자부활 시스템은 없는데 성장도 가능하지 않아서 연 10억원을 버는 사람도 여기서 망하면 끝이라고 생각한다. 촛불에 나온 사람들은 정치가 해결해야 할 것은 조금 더 패자부활이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어 달라고 나온 것이다.

정태근=진보진영과 야당에서 변화를 선도해야 할 위치에 있는 분들이 우리 사회의 변화에 대해서 예리하게 보지 못한 측면도 있다. 예컨대 97년 외환위기가 어느 날 갑자기 온 게 아니다. 구조조정을 방치하고 시장은 어려워지고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면서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진보진영조차 노무현정부 시절에 이명박정부 때보다 더 성장했다는 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곤란하다. 남북문제에 있어서 교류협력도 중요하지만 치열하고 절제된 논의가 있어야 한다. 이번 촛불이 분노했지만 절제했던 것처럼 말이다. 6월항쟁 이후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선 좀 더 깊고 치열한 논의가 있어야 한다.

촛불집회가 한국사회에 던지는 시사점

이남주=정권이 보수에서 진보로, 진보에서 보수로 바뀌는 과정에서 양쪽 정부 모두 성공적이지 못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느 한 편이 다른 쪽을 압도하지 못하니까 개별 정당의 힘만으로는 해결되기 어려운 영역에서는 협치가 필요하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우상호=6월항쟁은 진영논리나 대항논리로 싸웠다. 마찬가지로 민주적 퇴행으로 박 전 대통령이 탄핵당했지만 지금 탄핵의 방식으로는 국가를 끌고 나갈 수 없다. 1년 동안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를 한 경험을 보면 각 진영의 의견을 집대성해서 공론을 만들어야 한다. 수위와 속도는 논쟁이 가능하지만 어떤 방향인지에 대해선 합의가 없으면 안 된다. 예컨대 경제 양극화 해소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지만 개별 법 차원으로 들어가면 상당히 다르다. 남북문제도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는 같지만 구체적 방법론은 다 다르다. 자기 담론만 고집할 게 아니라 사회적 고민으로 만드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합의를 존중하는 정치력을 발휘하고 진영논리를 약화시키는 게 지금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정태근=협치가 가능하려면 나는 개혁의 주체이고 너는 대상이라고 구분해선 안 된다. 집권당이 속도와 성과에 연연해서도 안 된다. 지지율만 유지하려고 하면 충분한 협의가 안 된다. 과거에 보면 보수정당에서 경제 살리려는데 왜 협조 안 하냐 했는데 지금도 문재인 정부에서 일자리 만들려는데 왜 협조 안 하냐고 한다. 추경을 해서 빨리 일자리를 만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속가능한 일자리를 만드는 게 중요하고, 이걸 얼마의 비용으로 어떻게 구현할지 설득력 있게 얘기해줘야 한다. 비정규직에 반대한다고 경총을 질타한 것도 마찬가지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격차 얘기를 많이 하는데 대기업과 중소기업 문제가 더 심각하다. 대기업 비정규직이 중소기업 정규직보다 행복하다. 결국 최저임금을 올려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데, 저는 올리지 말자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최저임금을 올리더라도 국민한테 객관적이고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하는 게 중요하다.

이태호=촛불의 의미가 진보정권을 세우는 게 아니고 시민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는 정권이 쫓겨난 것으로 이해하면 국가가 고민해야 할 지점이 달라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시민들이 우선으로 두는 관심사가 바뀌고 있다는 것에 대해 정치권이 제대로 대응하는 게 중요하다. 예컨대 강남역 살인 사건은 일반 시민들이 일상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게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촛불 광장에서도 박근혜 대통령 퇴진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무대 아래서는 박 대통령의 여성성 비하로 가선 안 된다는 논쟁이 치열했다.

6월항쟁 세대가 국민에게 고함

이남주=6월항쟁 30년을 평가하고 촛불 혁명이 우리 사회에 주는 의미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마지막으로 6월항쟁 세대로서 국민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이태호=촛불에 대해서 말씀했듯이 6월항쟁 이후 누가 집권했든지 간에 시대교체는 느리지만 분명하게 돼왔다. 정권이 부족하면 시민사회가, 사민사회가 더디면 정권이 시대교체를 해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됐지만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이 됨으로써 시대교체도 있었다. 저는 고도성장보다도 이 변화를 이끈 시민들이 대한민국을 세계에 내세울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고 생각한다.

정태근=기본적으로 사회적 책임이 큰 사람이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하지만 사회 전체가 스스로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촛불에서 보여준 시민들의 모습은 한편으로는 개별적이지만 공동체를 염려하는 마음이 컸다. 굉장히 절제된 분노를 표출했다. 지금 문 대통령 지지자들이 보여주는 ‘문자 테러’는 전혀 촛불적이지 않다. 예컨대 원전 폐쇄 문제가 현실로 제기됐다면 전기요금이 올라가더라도 그걸 감내할 정도의 사회적 공감대와 스스로 전기를 적게 쓰겠다는 시민들의 인식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 전체 시민들이 발전하는 만큼 우리 사회가 발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상호=6월항쟁이 30주년을 맞는 해에 촛불이 결실을 맺고 정권교체가 됐는데 비관과 낙관이 교차하고 있다고 본다. 30년 전에 비해 각 정당의 정강정책은 비슷해졌는데 합의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오죽하면 선진화법을 만들었겠는가. 문 대통령이 돼서 좋지만 정치적 합의 없이 앞으로 나갈 수 없다. 6월항쟁 때는 대항의 논리로 접근하는 게 어쩔 수 없었다면, 탄핵이라는 헌정사의 비극을 통해 만들어진 정권이라고 하더라도 지금은 합의를 통해 공동체의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문제를 푸는 접근법이 87년과는 달라져야 한다는 얘기다. 미래로 가는 큰 비전과 어젠다는 사회적 공론화를 거치고 여야 지도자가 만나 큰 틀의 합의를 하면서 이끌고 가야 한다.

정리=김영화 기자 yaaho@hankookilbo.com 김정현 기자 virtu@hankookilbo.com

▦프로필

우상호

▲강원 철원(55)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81학번 ▲연세대 총학생회장(1987년) ▲17,19,20대 국회의원, 이한열추모사업회 사무국장,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정태근

▲서울(53) ▲연세대 경제학과 82학번 ▲연세대 총학생회장(1985년) ▲18대 한나라당 국회의원,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 사단법인 시민을위한정책연구원 이사장

이남주

▲서울(52) ▲서울대 경제학과 84학번 ▲서울대 총학생회장(1987년) ▲베이징대 정치학 박사 ▲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소장

이태호

▲강원 춘천(50) ▲서울대 서양사학과 86학번 ▲서울대 총학생회 사무국장(1989년) ▲참여연대 사무처장ㆍ정책위원장,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 공동상황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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