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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김기춘의 ‘환자복 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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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김기춘의 ‘환자복 수의’

입력
2017.06.09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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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사학 이사장이 2013년 입시비리 혐의로 구속수감될 때 모습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법원에 출석한 그는 몸에 링거를 꽂고 마스크로 입을 가린 채 구급차 간이침대에 누워 있었다. 영락없는 중환자 행색이던 그는 10시간 뒤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버젓이 두발로 걸어 나와 구치소로 가는 승용차에 올랐다. “아플 땐 법원으로” “구속영장이 특효약”이라는 우스갯소리가 한동안 나돌았다.

▦ 법의 심판대에 오른 거물들의 ‘환자 코스프레’ 효시는 건국 후 최대 금융부정 사건으로 기록된 ‘한보 부도사태’의 정태수 전 회장이다. 1997년 외환위기의 한 원인을 제공한 그는 구속 후 법정이나 국회 청문회에 늘 환자복 차림에 휠체어를 타고 나타났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의 그는 마스크까지 쓰고 쏟아지는 질문에 자물쇠 입으로 일관했다. 결국 그는 2심 재판도중 병 치료를 핑계로 출국해 10년 넘게 도피 중이다. 그가 국내에 남긴 거라곤 여전히 최고 기록인 2,225억원의 세금 체납액이다.

▦ 당시 그 모습이 워낙 강렬하게 남아서인지 그 후 검찰이나 법정에 출두하는 재벌 회장이나 거물들은 줄줄이 ‘휠체어 퍼포먼스’를 따라 했다. 텁수룩한 수염에 마스크는 기본이고 환자복과 휠체어는 덤이다. 요즘은 그 것도 약한지 침대에 산소호흡기까지 동원한다. 한국 재벌 회장은 체어맨이 아니라 휠체어맨이라는 비아냥이 외신에 소개될 정도다. 검사나 판사의 질문에는 전신에 통증을 호소하며 겨우 들릴 듯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감방에 보내거나 보석으로 풀어 주지 않으면 진짜 죽을 수도 있다는 협박 아닌 협박인 셈이다.

▦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지시한 혐의로 구속된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9일 마스크에 환자복 수의를 입고 법정에 출석했다. 지난달 말 “고령이고 건강이 좋지 않다”며 보석을 청구한 터라 이를 염두에 둔 전략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김 전 실장은 재판에서 “가끔 가슴 통증이 있는데 언제 어느 순간 심장이 멎을지 모르는 불안 속에 있다”고 호소했다. 병이 위중한데 억지로 구속 상태를 유지해서는 안되겠지만 거물이라는 이유로 특혜가 있어서도 안 될 것이다.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기 전에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안겨 준 데 대해 진솔한 사과 한마디가 있었으면 한다.

이충재 수석논설위원 cjlee@hankookilbo.com

'블랙리스트' 작성 및 관리에 관여한 혐의로 기소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9일 오전 처음으로 사복이 아닌 수의를 입고서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블랙리스트' 작성 및 관리에 관여한 혐의로 기소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9일 오전 처음으로 사복이 아닌 수의를 입고서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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