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복서’는 죽음과의 맞대결에서도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장례식을 직접 기획하는 담대함을 보였다. 무하마드 알리는 죽음을 대비해 무려 8년 동안이나 자신의 장례식을 계획해왔다. 자신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다만 흑인 복서이자 무슬림으로서 그가 갖는 상징적 의미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스포츠 전문매체 ESPN은 지난 3일(이하 한국시간) 1년 전 치러진 무하마드 알리의 장례식 뒷이야기를 소개했다. ☞관련기사
알리는 지난해 6월 3일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한 병원에서 74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그는 은퇴 3년 만인 1984년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투병 생활을 했고, 이후 폐렴과 요로 감염으로 건강 상태가 급격히 악화됐다. 전날 알리의 체온이 급격히 떨어져 가족들은 미리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병실에서는 이슬람식 기도가 울려 퍼졌고 아홉 명의 자녀와 그의 손주들이 쿠란을 낭송했다.
‘장례 프로젝트’는 이 때부터 작동했다. 우선 치료실이 있던 애리조나주에서 알리의 고향인 캔터키주까지 시신을 옮기는 작업부터 시작돼야 했다. 가장 먼저 프로젝트에 투입된 이들은 루이빌의 경찰 세 명이다. 이들은 가족들과 의료진이 장례절차를 준비하는 동안 알리의 시체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미국의 한 TV쇼가 임종 당시 알리의 모습을 포착한 첫 번째 사진에 20만 달러(약 2억2,404만원)의 포상금을 걸어놓은 상태였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알리의 고향마을 경찰들은 알리가 임종한 그 방에서 45분 동안 시신과 함께했다. 경찰 토드 캐신저는 “사진가들이 야위고 머리가 벗겨진 알리의 모습을 알아보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알리의 시신을 태운 비행기에서도 승객들은 비밀서약서를 써야 했다. 장례식을 총괄한 밥 거널은 알리의 가족과 측근들을 태운 전용기에서 알리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알렸다. 이 깜짝 발표마저도 알리가 직접 계획한 자신의 장례 해설서인 ‘더 북(The Book)’에 들어있었다. 같은 비행기에 타 알리의 죽음을 최초로 보도한 기자가 “장례식 규모가 얼마나 될 것 같냐” 고 묻자 알리의 부인 로니 알리는 “무하마드의 무덤은 ‘메카(이슬람 성지)’가 될 것”이라고 답했다. 이 대답에 ‘열린 장례식’의 진짜 이유가 있었다. 알리는 유명 복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아프리카계 흑인이자 무슬림의 희망이었던 것이다.
장례 프로젝트의 하이라이트는 10일 시민과 함께한 추모식과 운구 행렬이었다. 주최 측은 추도식 티켓을 무료 배포했다. 수많은 팬들이 노숙을 불사했고, 약 45분 만에 티켓 1만 5,000장이 동났다. 입장권을 구하지 못한 팬들이 돈을 주고라도 표를 사겠다고 나서, 암표까지 횡행했다. 주최 측이 “알리는 모든 이벤트가 무료로 진행되길 바랐다. 장례식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라고 호소한 후에야 암표행렬은 멈췄다.
8만8,000장의 장미꽃잎이 운구차량의 레드카펫이 됐다. 알리의 열렬한 팬이던 플로리스트 매기 카사로가 기획한 ‘장례 프로젝트’의 일부다. 알리의 이름을 연호하는 팬들의 함성과 가족들의 눈물이 꽃잎들과 뒤엉켰다. 마지막은 로니 알리가 마무리했다. 로니는 ‘재산을 노려 과부가 될 걸 알면서 일부러 결혼했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아왔다. 로니가 직접 알리의 무덤에 마지막 흙을 덮는 것으로 남편의 장례는 막을 내렸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아버지의 소아마비에 비해 남편의 파킨슨병은 오히려 평범했다.”
대중들이 가졌던 로니에 대한 오해가 풀림과 동시에 8년에 걸친 ‘더 그레이티스트(The Greatestㆍ알리의 별명) 기획·주연’의 장례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오수정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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