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세상을 그리다] 밥․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아는 여인들은 저마다 능숙한 솜씨로, 자신만의 리듬으로 춤추듯 유연하게 움직인다. 고래뱃속 제공

밥․춤

정인하 글, 그림

고래뱃속 발행ㆍ38쪽ㆍ1만3,000원

기다란 장대가 툭, 옷걸이를 잡아챈다. 체크무늬 재킷이 펄럭 어깨춤을 춘다. 걸린 옷을 꺼내랴, 다림질 하랴, 다시 걸어 놓으랴, 세탁소 아주머니는 쉴 틈이 없다. 다리미 내려놓을 시간, 걸음 옮길 시간조차 아까워서 한 손에는 다리미를 들고 다른 손으로 장대질을 한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지라 이골이 났다. 상체를 기울이고 팔다리를 앞뒤로 죽 뻗으며 아슬아슬 균형을 잡는다. 발레리나 못지않은 세탁소 아주머니의 우아한 몸짓을 눈썰미 좋은 작가가 기민하게 포착했다.

정인하의 그림책 ‘밥․춤’은 여성들이 일하는 모습에 주목한다. 심상치 않은 제목의 이 그림책 속 여인들은 세탁을 하고, 채소를 팔고, 구두를 닦고, 국수를 뽑고, 음식을 나른다. 목욕탕에서 때를 밀고, 물건을 배달하고, 거리를 청소하고, 건물 유리창을 닦는다. 거리에서, 동네에서 줄곧 마주치는 이들이다. 공사장에서 못을 박는 이도 있고, 흙짐을 지는 이도 있으며, 교통경찰도 있고, 주부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직업의 여성들을 그림책에서 만나본 적이 있었던가. 그동안 우리 그림책이 여성의 일을 어떻게 그려왔는지 문득 뒤돌아보게 된다.

이들이 일하는 모습에서 작가는 ‘춤’을 읽었고 ‘춤’을 그렸다. 채소값을 흥정하며 비닐봉지를 뽑아드는 경쾌한 몸짓에서, 반죽을 치고 당기며 국수를 뽑는 튼실한 팔뚝에서, 흙먼지 날릴세라 조심조심 비질하며 떼어놓는 종종걸음과 탑처럼 쌓아 올린 음식 쟁반을 이고 우쭐우쭐 내딛는 잰걸음에서 발견한 흥과 리듬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아는 여인들은 저마다 능숙한 솜씨로, 자신만의 리듬으로 춤추듯 유연하게 움직인다. 일용직, 임시직, 영세 사업자, 그 밖의 또 어떤 이름들 뒤에 가려졌던 이들의 얼굴이, 제 힘으로 제 삶을 떳떳하게 꾸려가는 이들의 활기찬 몸짓이 우리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역동적인 구도, 먹의 농담을 감각적으로 구사한 그림이 아름답다. 일하는 여인들의 실팍한 어깨와 팔뚝, 압도적인 양감의 허벅지가 태산처럼 미덥다. 저 팔뚝과 허벅지가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일하는 여성들의 초상화라 불러도 좋겠다. 작가가 포착한 춤은 이들이 살아온 세월이고 열정이며 자부심이고 삶이다. 글러브 대신 이태리타월을 낀 저 여인은 신화 속 역사처럼 당당하고 아름답다. 이 당당하고 아름다운 여성들이 빛을 잃지 않는 세상,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다.

최정선ㆍ어린이책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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