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김진석의 우충좌돌] ‘소통’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

입력
2017.06.06 13:15
0 0

박근혜 실패 소통부재 탓만이 아니고

부패와 무능, 권위주의가 더 큰 문제

적폐청산 대담하고 유연한 전략 필요

일방적으로 좋은 말이 있다. ‘커뮤니케이션’의 번역어인 ‘소통’(疏通)이 그렇다. “물리적 장애에 의해 막히지 않고 트여서 잘 통한다”는 뜻은 알게 모르게 전근대적이고 자연적인 이상을 부추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소통’의 그런 시대착오적 이해방식이 지금도 완강하게 사람들의 선입견을 조장한다. 그와 달리, ‘커뮤니케이션’은 꼭 그런 자연적이고 이상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비록 어원적으로는 ‘함께 나눈다’는 뜻을 가지기는 하지만, 이것은 정보를 처리하는 일련의 선택적 과정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여론’은 자료에 대한 선택적 접근과 통제의 결과이다. 그럼, 이 두 말 사이의 괴리는 그저 번역의 문제일까. 그렇지 않다. 저 이상적인 ‘소통’에 호소할수록, 기괴한 일들이 일어난다.

악몽 같았던 박근혜 시절, 모든 미디어들이 ‘소통의 부재’ 탓을 했다. 그러나 그 정부의 실패가 단순히 ‘소통의 부재’에서 기인했을까. 실제 위험은 그것보다 훨씬 뿌리가 깊었다. 부패와 무능, 그리고 그것들과 결합된 권위주의가 그것이다. ‘소통의 부재’는 기껏해야 그것들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만나서 제대로 얘기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능하거나 다른 권력관계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권력의 실패를 ‘소통의 부재’ 탓으로 돌렸고, 그것을 해결한다며 ‘소통’에 호소했다. 착한 말은 얼마나 사람을 잘 속이는지!

어쨌든 ‘소통’의 부재라는 상처는 사람들에게 꽤 깊었다. 역설적으로 그 상처 때문에 새 대통령의 인간적 겸손함과 소탈함은 역대 최고로 빛났다. 그런데 ‘소통의 부재’와 마찬가지로 ‘소통’도 진짜 문제는 아닐 수 있다. 소통은 과도하게 인간적인 미덕을 강조하는데, 실제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은 이질적인 이해관계에 대해 인위적이고 선택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를 보자. 그것은 자연적인 공중(公衆)을 형성하기보다 매우 선택적으로 친구들을 연결한다. 유명인의 팬들은 매우 중요한 사회적 현상이 되었는데, 인간적인 친밀함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그들도 실제로는 선택적 인위성에 근거한다.

놀랍게도, 같은 말이라는 ‘커뮤니케이션’과 ‘소통’은 적잖게 다르다. 물론 ‘인간적 소통’의 효과는 커뮤니케이션에 기여할 수 있고, 서로 교차할 수도 있다. 특히 대통령의 인간적 친근함은 중요한 정치적 자산으로서 권위주의적 적폐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둘은 얼마든지 서로 통하지 않을 수 있다. 노무현의 인간적 매력에 동감했던 사람들도 정책을 둘러싸고 등을 돌렸는데, 그만큼 정책들은 독성이 강하다. 조금 극적으로 말하면, 인간적 소통이 쉽게 통하지 않는 지점에서 정치적 커뮤니케이션이 ‘잔인하게’ 시작될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지만, 대통령에게는 훨씬 더 그럴 것이다.

‘소통’과 커뮤니케이션의 괴리는 피할 수 없다. ‘소통에의 의지’는 권위주의를 털어내는 데 매우 효과적이지만, 권위주의적 적폐가 ‘소통’만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 실제로 정부 내부의 핵심적 개혁과제인 ‘검찰’과 ‘국방’에서 권위주의는 부패와 무능과 서로 결합되어 있고, 이것들은 단순히 ‘소통’만으로는 해결되기 힘들 것이다. 때로는 장악하고 때로는 심지어 적과 협력하는 전략이 필요할 것이다. 더욱이 개혁 과제에 따라 전략도 달라질 것이다. 검찰과 국방의 경우, 통제하면서도 동시에 제대로 일하는 사람들의 협력을 끌어내는 일이 필요하다. 검사와 장군 출신이 아닌 민간인이 장관이 될 때가 커다란 전환점일 것이다. 당장 되기 힘든 일일 수도 있지만, 너무 오래 기다릴 수도 없는 일이다. 일자리 창출은 개혁 과제와 또 다른 커뮤니케이션을 요구할 것이다. 공기업에서 정규직을 확대하는 일은 그래도 정부가 개입할 여지가 크지만, 민간기업은 그렇지도 않다. 규제할 힘을 가지면서도 기업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협력하는 고난도 기술이 필요하다. 어쨌든 선의나 신념을 강조하기보다는 정책의 결과에 집중해야 한다.

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