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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유치원 선생님에게 배운 스승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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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유치원 선생님에게 배운 스승의 길

입력
2017.06.05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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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출어람. 세상 모든 선생님들을 힘들게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나도 그렇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자들은 무섭게 성장하는데, 나를 가르친 스승님들은 따라가고 싶어도 늘 저만큼 멀리 계셔서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다.

박노해 시인의 스승이라는 시에서 ‘훌륭한 제자란 선생을 잡아먹는 자, 훌륭한 선생은 끝없이 정진하며 추격하는 제자에 앞서서 도망가는 자’라는 구절을 읽었다. 훌륭한 제자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르침에 따라 순종하며 앞만 보고 따라 달리면 되었다. 그런데 제자를 가르쳐보니 훌륭한 스승이 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제자들이 장차 학습을 독자적으로 할 수 있고 뚜렷한 동기를 가지고 흔들림 없는 배움의 자세를 갖추게도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은 스승의 생각과 삶까지도 보고 배우고 있기에 잠시도 바른 삶에 대한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스승 복’ 많은 사람이다. 지금도 그분들의 삶을 배우고 있고 존경하고 있다. ‘스승 복’과 관련된 첫 기억은 ‘나비유치원’ 무궁화반 차미애 선생님이다. 어릴 적에는 내 마음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못해 ‘우리 선생님 착해요. 좋아요’ 했는데 이제 그때 감정들을 공평함, 정의로움, 온유함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7살 어린 아이들을 앉혀놓고 매일 수업을 하시면서 한명의 아이도 섭섭하지 않도록 발표를 시키고 칭찬해 주셔서 어린 나와 친구들 마음에 우리 선생님 착하다(혹은 공평하다)고 느껴지게 해주었다. 쉬운 일 같지만 모두가 차별을 느끼지 않게 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7살 여름의 기억이다. 우리 반에 말수가 적은 친구가 있었다. 그 아이는 여름에도 매일 왼손에 긴 장갑을 끼고 유치원 수업을 받았다. 같은 반 친구들이 그 장갑이 궁금해 왜 끼고 있는지 묻기 시작했지만 그 친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떤 날은 울었다. 급기야 몇몇 아이들이 선생님의 부재를 틈타서 “여름에 장갑 끼는 아이”라고 놀렸다.

어느 날 선생님이 그 사실을 아시고 수업 중 그 아이를 앞에 세우고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장갑을 벗겼다. 왼쪽 팔에 심한 화상으로 큰 흉터가 있었다. 우리 모두는 처음 본 화상 흉터에 놀랐다. 그때 선생님이 “이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사랑하는 친구가 상처 입은 건 너무 가슴 아픈 일이야.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선생님이랑 우리 반 친구 모두가 이 상처를 예뻐 해주자”하셨다. 그날 이후 우리는 모두 그 친구를 더 배려해주고 아껴주었다. 반사적으로 팔을 움츠리고 말을 안 하던 친구는 말은 물론이고 장갑도 벗고 바깥놀이에서 신나게 뛰는 친구가 되었다.

어린 시절 찰나의 기억이 평생 내 마음에 잔잔한 감동으로 남아서 내 앞에 닥치는 일들에 반영되었다. 이렇게 스승의 바른 마음은 지식이나 기술 전달 이상으로 중요하다.

몇 년 전 일본에서 귀국했을 때 대학시절 스승에게 손 편지를 썼다. 일본에서 만만치 않은 사회생활을 하고 돌아와 보니 스승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귀한 것 인지 알게 되었다. 그 마음을 말로 다 못해 글로 썼다. ‘선생님 덕분에 좋아하는 일 하며 먹고 살아요. 감사합니다’ 라는 노골적인 표현도 썼다. 예술학과이다 보니 졸업생들이 전공을 살리는 일이 쉽지 않다. 선생님은 늘 제자들의 먹고 살길을 같이 고민했다. 대학 때는 넘치게 좋은 가르침을 주시는 걸로도 충분한데, 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사회에 나가보니 그 마음이 이해가 됐다. 노래도 노래지만 전공을 살려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너무 감사하다.

어느덧 나도 내 스승님들과 비슷한 길을 가고 있다. 제자들 전공으로 먹고 살 길을 걱정하고 삶으로 그들에게 본보기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좋은 스승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으므로 제자들에게 그 사랑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스승님들처럼 제자들에게 때론 친구가 되고, 때론 그늘이 되고, 때론 앉아서 쉴 수 있는 그루터기가 되어주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고 싶다. ‘서시’의 한 구절처럼 스승들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삶이 되기를 날마다 소망한다.

홍본영 뮤지컬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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