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의 새로운 조선은 무엇인가?” 지난달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개막한 서울시뮤지컬단의 ‘밀사-숨겨진 뜻’은 1907년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네덜란드 헤이그로 파견된 세 명의 특사에 대한 이야기다. 그 중에서도 올해 탄생 130주년을 맞이한 청년 밀사 이위종이 주인공이다. 미국, 러시아의 공사를 역임한 아버지 이범진의 영향으로 7개국 언어에 능통했던 이위종이 헤이그 밀사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이후 연해주 독립군과 러시아 군사학교를 거친 뒤 숨을 거둔 비극적 생애를 그린다.
최근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국내 창작 뮤지컬들이 잇따라 무대에 오르고 있다. 지난해에는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과 고종의 명으로 김옥균을 암살하게 되는 조선 최초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를 모티프로 한 ‘곤 투모로우’, 경성시대 문인들의 모임인 ‘구인회’에서 모티프를 얻어 당시 예술가들의 삶을 그린 ‘팬레터’가 공연됐다. 올해 초부터는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를 그린 ‘영웅’, 윤동주 시인의 청춘과 삶을 무대로 옮긴 ‘윤동주, 달을 쏘다’가 무대에 다시 올려졌다. ‘경성특사’와 ‘청춘, 18대 1’는 각각 1920년대와 1945년 청춘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린 창작 뮤지컬이었다.
암울한 시대에 던져진 주인공은 매력적 소재
전통, 서구 섞인 독특한 문화로 이야깃거리 풍부
‘영웅’ 등 대작 꾸준한 인기 속 신작도 잇따라
‘밀사’ 금수저 청년 고뇌 등 시대 반영해 공감대
‘경성시대’, 아직 캐내지지 않은 보물창고
신문물이 밀려오고 500년 왕조가 몰락하던 조선 말기는 격동의 시기였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는 조국의 국권 회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역사적 인물들이 있었다.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사연이 많았고, 극적 요소를 중요하게 여기는 뮤지컬이 이를 놓칠 수 없다. 이 시기 작품이 많이 만들어지는 가장 큰 이유다. 뮤지컬 평론가인 원종원 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뮤지컬은 노래로 이야기를 표현하고 음악을 빌려 관객의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장르라 극적인 상황을 찾게 되는데 조선 말과 일제강점기는 그 자체로 극적인 시기”라고 분석했다. 그는 “조국을 위한 희생이나 인물들의 개인적 이야기도 음악으로 표현하기 용이한 부분이 많다”고 덧붙였다.
특히 개화기 문물의 급작스러운 범람으로 이를 완전히 수용하지도, 그렇다고 무시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발생한 여러 사연이 뮤지컬 제작자들의 흥미를 이끌어내고 있다. 윤동주 외에도 백석과 이상 등 혼돈의 시대를 불우하게 살다간 예술가를 다룬 이야기가 많은 이유다.
뮤지컬 전문지 ‘더 뮤지컬’의 박병성 편집장은 “2000년대 중반 이후 ’경성시대’가 하나의 문화코드로 자리잡았다”고 말했다. 2000년대 중후반 영화 ‘라디오 데이즈’(2008) 등을 필두로 일제강점기의 어두운 현실만을 그리기보다 새로운 문물을 향유하는 젊은이들을 내세운 작품의 제작이 뮤지컬계와 영화계에서 붐을 이뤘다. 박 편집장은 “시각적으로 봤을 때 이 시기는 전통적인 문화와 서구적인 것들이 섞이면서 흥미로운 요소를 이끌어내기에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효용성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역사극을 만들 때 비교적 현대에 가까운 근대 시기는 역사적 고증이 수월해 다른 역사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작하기가 용이하다. 김덕남 서울시뮤지컬단장은 “역사적인 사실에 기대 작품을 만들 경우 더 이전 세대는 재연에 어려움을 더 겪을 수밖에 없지만 이 시기는 자료들도 많고 매력을 조금 더 갖게 된다”고 말했다. 한 공연계 관계자는 “제작비 절감의 관점에서 현대식 복장을 무대에 올릴 수 있다는 점도 뮤지컬이 조선시대가 아닌 조선 말기를 소재로 삼는 이유 중 하나”라고 귀띔했다.
현재 일깨우는 과거 소재일 때 성공
조선 말과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공통분모를 지녔다 해도 시장의 평가는 작품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다. 박병성 편집장은 “일제시대는 무조건 암울하다고 생각했다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경성의 봄’을 노래한 작품들이 대거 등장했다”며 “4,5년 전까지 독립운동 이야기만 하지 말고 이런 측면도 부각해보자는 작품들이 많았지만 큰 공감을 자아내지는 못했고 작품 제작이 이어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대신 잘 알려진 인물이라도 새로운 모습을 부각시킨 경우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좋은 평을 받았다. 서울예술단의 ‘잃어버린 얼굴 1895’는 명성황후의 새로운 모습을 무대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선 말을 배경으로 애국심을 고취하는 대신 명성황후 개인에게 집중해 그의 내면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이다. 박 편집장은 “역사적 혼란 시기에 여태까지 보여줬던 명성황후에 대한 이분법적 관점이 아니라 왜 사진 찍기를 두려워했는지 등 개인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던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평했다. 원종원 교수도 “이전에는 국가, 당위성, 전체주의적 사명감을 강조한 뮤지컬 비중이 컸다면 최근에는 그보다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가는 추세”라고 말했다.
근대라는 배경은 현대와 그리 무관하지 않아 관객의 호응을 얻을 수 있기도 하다. 근대 이전 시대의 소재는 현실과 지나치게 동떨어진 이야기로 들리고, 현대를 배경으로 지금 이곳의 문제를 다루면 대중적 뮤지컬이 아닌 ‘다큐멘터리’가 될 수 있다고 업계는 보고 있다. 현대와 전근대 사이에 낀 근대 시기를 통해 현재의 문제를 우회적으로 언급할 수 있고, 관객도 해당 이야기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2009년 초연 후 올해 8번째 무대에 올라 그 어느 때보다 흥행에 성공한 ‘영웅’이 대표적이다. 원종원 교수는 “당시 풍전등화 같았던 백성의 삶과 ‘영웅’ 속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가 이 시대 위로를 받고 싶어하는 관객의 공감을 자아낸 것으로 보인다”며 “점점 더 시국이나 요즘 정서들을 비유적으로 반영한 작품들이 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원 교수는 “‘밀사’의 이위종도 요즘 표현대로 하면 ‘금수저’임에도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긴 힘없는 조국에서 자신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혼란을 겪는 모습이 현대를 사는 청년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덧붙였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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