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촌스러운 시절이었다. 풍요라곤 없었던, 배부르게 먹는 게 지상 과제였던 1960년대. 충북 충주의 한 소녀는 달랐다. 동네 아이들이 알몸으로 물장난하는 개울에 ‘다후다(태피터ㆍ나일론으로 만든 실크 촉감의 방수 섬유) 수영복’을 입고 나타났다. 기계로 주름을 잡은 치마는 당시 입고 앉아도, 빨아도 주름이 펴지지 않는 신문물이었다. 그걸 제일 먼저 구해 입은 것도 소녀였다.
소녀는 한국 패션계의 거장이 됐다. 패션 디자이너 지춘희(63) 미스지컬렉션 대표. 그의 어머니(작고)는 말하자면 시대를 한참 앞서 간 ‘욜로족(지금 당장 느낄 수 있는 행복에 투자하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가진 돈의 2할만 입고 먹는 것에 쓸 때 우리 가족은 8할을 썼다. 단지 돈이 많아서 풍족했던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가치관이 그랬다.” 지 대표의 감각과 안목은 그렇게 만들어지고 단단해졌다. 공부하라고 다그치는 ‘호랑이 엄마’가 아니라 넓은 세계를 보여 준 ‘신식 엄마’가 ‘지춘희’라는 브랜드를 만든 셈이다. 지 대표는 2일 서울 청담동 미스지컬렉션 작업실에서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머니가 ‘전형적 옛날 어머니’와는 다른 것 같다.
“화려한 여성이었다. 그 어려운 시절에 물건의 질을 따졌다. 외제 물건도 좋아했다. 수소문 해서 미군 물품을 구해 쓰고 커피를 사러 충주에서 강원도 원주까지 다녀 오는 사람이었다. 수입 옷을 해체해서 내 옷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국내에선 그런 좋은 소재를 구할 수 없었으니까. 감각이 남다른 어머니에게 많이 배웠다.”
-어릴 때부터 패셔니스타였나.
“패션이 뭔지 잘 몰랐다. 어머니가 골라 주는 옷을 입으면서 ‘나는 어쩐지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르다’는 생각은 했다. 부모님은 4남매 중 첫째인 나를 아낌 없이 사랑했다. ‘다후다 수영복’을 사다 준 건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였다. 동생들이 태어나 사랑을 빼앗기는 게 싫었다. 속을 끓이다 몸이 아파서 입원한 적도 있다. 부모님이 나를 걱정하는 눈빛만 보고도 다 나았지만(웃음).”
-행복하게 자란 경험이 패션 디자이너로 성공한 양분이 됐나.
“느끼고 경험한 모든 것이 지금의 나에게 스며 있다. 다양한 음식을 잘 먹고 자란 것도 힘이 됐다. 맛과 멋은 통하는 것이니까. 부산 사람인 어머니는 내륙인 충주에서 구경하기도 힘든 해삼 같은 귀한 해산물까지 구해 먹었다. 끼니마다 생선이 빠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음식의 양보다 질을 중시했다. ‘많이’가 아니라 ‘잘’ 먹는 걸 중요하게 여겼다. 아버지가 자동차 사업을 했다. 가난하진 않았지만 늘 부자였던 건 아니다. 돈이 많든 적든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자는 게 부모님 신조였다. 부모님이 그런 분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내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어린이 지춘희’는 참 행복했겠다.
“행복하지 않은 어린이도 있나. 철 없을 때는 다 행복하다(웃음). 혼자 상상하는 걸 좋아하는 얌전하고 말 없는 아이였다. 내가 쓴 드라마에서 뭐든 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비련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멋진 남성의 애인이 되기도 하고 공주가 되기도 하고. 극장도 많이 다니고 소설책도 열심히 읽었다. 그런 것들이 새로운 걸 창조하는 동력이 됐다. 옷은 결국 상상에서 나오니까. 요즘도 상상을 많이 한다.
어릴 때 경험한 자연이 패션의 영감이자 소재다. 뛰어 다닌 동네 곳곳이 온통 초록이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햇빛이 사물의 색을 미묘하게 바꾼다는 걸 생생하게 목격했다. 패션 디자이너에게는 소중한 경험이다.”
-자연과 하이 패션은 잘 어울리지 않는데.
“자연은 최고의 재료다.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원칙은 소재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내 옷의 디자인을 좋아하는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도 ‘최고의 원단을 쓴다’고 말한다. 기본이 중요하다. 유명한 요리 학교를 나와야 좋은 셰프가 되는 건 아니다. ‘엄마 음식’의 맛이 좋은 셰프를 키운다. 자연이라는 경험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꽃과 나무를 늘 가까이 한다.”
-‘지춘희 패션’이 ‘자연스러움’으로 요약되는 건 그래서인가.
“특별한 것에서 영감을 구하지 않는다. 생활과 사람에서 자연스럽게 찾는다. 매년 두 번씩 내놓는 컬렉션에는 ‘내가 지난 6개월을 어떻게 살아냈나’가 고스란히 담긴다. 여행도 중요한 원천이다. 여행지에서 본 아이의 독특한 치맛자락에서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큰 프로젝트를 하기 전에 여행 계획부터 치밀하게 짜 둔다. 패션 잡지는 전혀 안 보지만 여행 잡지는 챙겨 본다. 얼마 전엔 부탄에 다녀왔고 올 여름엔 아프리카에 간다.”
-거물 패션 디자이너는 여행지에서 어떤 옷을 입는지 궁금하다.
“언제 어디서 뭘 입을지를 세세하게 구상해서 준비한다. 여행 전 밤을 새며 짐을 싼다. 한 순간도 흐트러지거나 후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꾸민 티를 내서도 안 된다. ‘편안하면서 멋지게’ 보이려니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든다. 나이 들수록 가릴 데가 많으니 더 그렇고(웃음).”
-결국 어머니와 자연이 ‘지춘희’를 만든 건가.
“의식하며 살지 않지만 나라는 사람 안에 다 녹아 들어 있을 거다. 스타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거창한 계획 같은 건 없었다. 작은 의상실을 하다가 1980년대 초에 당시엔 어마어마한 규모인 265㎡(80평)짜리 ‘미스지컬렉션샵’을 서울 명동에 냈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옷을 만들었는데 첫해부터 성공했다. 재고가 9벌밖에 남지 않았다. 매일을 충실하게 살되 내가 여전히 부족한 사람이라는 자각과 조금 더 좋은 옷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을 놓지 않아 여기까지 왔다. 사실 국내 패션 산업이 걱정이다. 후배들이 안쓰럽다. 하지만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패션은 실력이니까.”
-언제까지 옷을 만들 건가.
“디자이너는 나이가 많든 적든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이다. 나이는 문제가 아니다. 체력과 호기심이 남아 있을 때까지 만들고 싶다. 미래의 사람들이 ‘지춘희 옷이 참 예뻤다. 잘 입었다’고 말해준다면 충분하다.”
-옷을 잘 입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제발 마음대로 입자. 촌스러우면 어떤가. 왜 모두가 세련돼야 하나. 패션의 완성은 ‘나’다. 내 생각을 표현하면 된다. 특히 나이든 사람도 농익은 멋을 자유롭게 표현했으면 좋겠다. 패션은 젊은이의 전유물이 아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 후보자와 윤여정씨가 시니어 패션의 물꼬를 트고 있다.
싼 옷 10벌을 사느니 1,2벌 사서 아껴 입자. 멋도 좋지만 환경도 생각했으면 한다. 한국인이 유럽인보다 옷을 못 입는다고 하는데 역사가 짧아서 그렇다. 그들의 옷을 가져다 입는 것이니까. 이제 학습이 다 끝난 것 같다. 뭔가 달라지는 게 눈에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의 패션은 어떤가.
“잔무늬 또는 단색 대신 선명한 줄무늬 넥타이를 고른 건 영리했다. 젊고 박력 있고 일하는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심었다. 눈빛이 강해서 머리를 지금처럼 부드러운 색깔로 염색해 눌러 줘야 한다. 걷는 모습을 보니 바지 통은 좀 더 여유 있게 입는 게 좋겠다. ”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김도엽(경희대 정치외교학 3)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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