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대로 올라가는 언덕배기 오르다...’ 예능프로그램’ 1박2일’과 ‘윤식당’ 등을 연출한 나영석 CJ E&M PD에게 오래된 만화방을 추천해 달라고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보냈더니 딱 1분 만에 답 문자가 왔다. 프로그램 관련 인터뷰로 연락하면 그렇게 내빼더니, 만화방 얘기를 꺼내자 동지를 만난 듯 반가워한다. ‘X세대’로 불렸던 94학번 나 PD는 만화광이다. ‘슬램덩크’와 ‘H2’는 10번 넘게 봤다고 한다. 격무에 시달리는 그에게 만화방은 쉼터다. 옛 만화방을 홀로 가 남 눈치 안 보고 책을 보는 게 소소한 취미다. 가족의 놀이터로 찾는 이도 있다. 그룹 젝스키스로 활동했던 고지용은 휴일에 아들 승재를 데리고 만화카페를 찾아 시간을 보낸다. 만화방은 카페로도 진화해 시대를 거슬러 저마다의 특색을 내세워 다양한 세대의 휴식 공간으로 주목받고 있다. 내 취향에 맞는 공간은 어디일까? 궁금해 하는 독자들을 위해 오래된 만화방과 최신 만화카페의 극과 극 체험을 소개한다.
만화방: 냄비 라면 먹으며… 나홀로족의 낭만
비늘 벗겨지듯 풍화된 건물의 계단을 오를 때부터 추억 여행은 시작됐다. 입구 위 누전차단기 주위로 똬리를 튼 전선이 28년 된, 홍익대 인근 ‘코믹토토만화카페’의 세월을 보여 줬다. 어두운 불빛 아래 늘어선 예스러운 소파와 빛 바랜 만화책을 보니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온 기분이다. 만화방 이름에 쓰인 ‘카페’가 제 주인을 찾지 못한 듯했다. 중세시대 성 모양을 한 예식장에 현대적 웨딩홀이란 이름이 붙여져 있을 때 느끼는 감정과 유사하다고 할까. 청년 문화의 요람에 둥지를 튼 옛 만화방에 누가 올까 우려했지만 걱정도 잠시, 뜻밖에 20대가 주로 찾았다. 세련된 만화카페 대신 이들이 옛 만화방을 방문한 이유는 “커플을 피해” 혹은 “낭만을 찾아서”였다.
앞보기로 배치된 소파서
혼자 앉아 낄낄대며 보는 재미
허름해도 낭만 가득한 공간
‘만화 마니아’ 나홀로족에 딱
만화방은 ‘나홀로족’의 문화 성지였다. 만화책 ‘남과 여’를 보고 있던 김덕주(25)씨는 “신식 인테리어의 만화카페는 연인들이 많이 와 혼자 시간을 보내기엔 이런 만화방이 좋아 짬을 내 왔다”고 말했다. 역시 혼자 만화방에 온 박보경(27)씨는 “드라마 ‘심야식당’을 보고 왠지 모르게 식당이나 만화방을 혼자 가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며 “만화카페는 소음이 커 만화에 집중할 수 있는 만화방에 온다”고 했다. 이들의 성향을 반영하듯 미아동의 ‘까치만화방’과 쌍문동의 ‘북카페’ 등 오래된 만화방은 1~2인용 소파를 앞사람 등을 바라보게 한 방향으로 배치했다.
만화방은 ‘7080의 먹거리 장터’이기도 했다. 라면도 양은냄비에 내놓고, 자장면 배달도 허락한다. 쥐포를 구워주기도 했다. 나 PD같이 만화방의 추억을 지닌 40~50대를 잡기 위해서다. 취재를 위해 들른 세 곳의 만화방은 모두 인테리어를 바꿀 계획이 없다. 쌍문동에서 만화방을 운영하는 오근승씨는 “괜히 리모델링을 해 단골 40~50대를 잃을 수 있다”고 했다. 홍익대 인근 만화방에는 허영만 화백이 1984년 낸 ‘황금충’ 등 옛 희귀 만화책도 있었다. 호일 그릇에 나온 라면을 먹으며 누렇게 색이 바랜 책을 펴니 주판알을 튕기는 경리부 직원의 모습에 실소가 터진다. 역사체험이 따로 없다. 변한 것은 요금제가 전부다. 대여 권수(권당 200~300원)로 받던 요금은 시간제(시간당 2,000~2,500원)로 바뀌었다.
그렇다고 만화방에 과거만 있는 건 아니다. 유행하는 만화의 흐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 만화방이다. 만화책 마니아들이 주로 찾기에 일본 등 해외의 화제작이 가장 먼저 구비된다. 세 곳의 만화방을 둘러보니 20~30대는 ‘원펀맨’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 ‘블랙 클로버’ 등 일본 만화를 주로 봤다. 휴대폰으로 신간의 사진을 찍어 온라인에 올리는 얌체족 때문에 속앓이도 한단다. 만화방이 어느새 책을 대여하지 않게 된 이유였다.
만화카페: 당당하게 누워서 독서… 찜질방 같은 휴식처
“40대인데 이용해도 될까요?” 지난 24일 서울 홍익대 인근 만화카페 ‘클럽보다 만화’. 셔츠에 면바지를 입은 남성이 입장을 망설이며 눈치를 본다. 어려서 다녔던 만화방의 모습과 판이해서다. 중년이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다. 우주선 안과 북유럽 한 가정집의 모습을 혼합했다고 할까. 앉으면 바로 수십 년 묶은 쾨쾨한 담배 냄새를 뿜어낼 것 같은 낡은 소파나 옛날 떡볶이 집에서 자주 봤던 플라스틱 테이블은 없다. 첨단과 아늑함을 아우른 만화카페는 신세계가 따로 없다. 만화카페가 ‘불금’의 성지로 떠오른 이유다.
세련된 인테리어에 눈이 번쩍
즐길 수 있는 복합공간으로
가족, 연인 단위로 많이 찾아
주말엔 붐비고 소음 감수해야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누워서 만화책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창가 쪽에서 햇볕을 받으며 벌집 모양의 누에고치에 들어가 자유롭게 누워 만화를 봤다. SF영화 속 미래의 집을 보듯 신비롭다. 20~30대 커플들이 주로 애용했다. 이들에게 만화카페는 새롭게 떠오른 데이트 코스다. 만화책 보다 연인과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크다. 남자친구와 함께 만화책을 보던 김모(25)씨는 “만화책도 보고 잠시 눈도 붙이고 이렇게 자유롭고 편한 데이트 장소도 없다”며 웃었다. 외국인들에게도 입소문이 났다. 벌집 모양의 공간에 기대 커피를 마시는 만화카페가 외국인의 눈에도 낯설게 보였다. ‘클럽보다 만화’의 박정은 점장은 “한글을 몰라 만화책을 보지 못하면서도 외국 관광객들이 자주 온다”고 말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쉬러 오는 직장인도 있었다. 만화카페가 쉴 곳이 마땅치 않은 현대인들의 휴식처로 거듭나고 있다. 만화방에선 구경도 못할 치즈가래떡구이를 먹으며 소파에 눕듯 기대 만화책을 보니 휴가를 맞은 기분이다.
만화카페는 만화방과 입장 방식부터 다르다. 신발을 벗어 개인 신발장에 넣은 뒤 슬리퍼를 신고 들어가야 한다. 만화책 검색도 컴퓨터로 한다. 가게 사장님을 불러 책 찾아 달라고 하면 ‘만화방 세대’를 인정하는 꼴이니 주의해야 한다.
만화카페는 가족의 새 놀이 공간 역을 톡톡히 했다. 24시간 돌아가는 환풍시설로 미세먼지의 공격을 피할 수 있고, 나무로 된 턱 낮은 테이블과 앙증맞은 색색의 쿠션으로 꾸민 인테리어가 편안함을 줘 가족 단위로 주말에 만화카페를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만화카페에는 만화방과 달리 ‘메이플스토리’ 등 어린이 만화책도 있다. 이날 만화카페엔 30대 부부가 아이를 눕혀 놓고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김모(33)씨는 “요즘 젊은 부모 중엔 가족끼리 모여 만화카페에 가기도 한다”며 “어느 정도 큰 아이들을 둔 부모들은 만화카페에 아이들을 놀게 하고 부부만의 시간을 갖는다”고 웃으며 말했다.
단 만화책을 정독하고 싶은 이들에겐 어린이와 가족 단위의 손님이 몰리는 주말은 ‘독’이다.
글ㆍ사진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김도엽(경희대 정치외교학 3)ㆍ이진우(서울대 경제학 3)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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