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5.31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을 사임하게 한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의 제보자가 사건 당시 미연방수사국(FBI) 부국장 마크 펠트(Mark Felt, 1913~2008)라는 사실을, 2005년 5월 31일 패션 잡지 ‘배너티 페어 Vanity Fair’가 특종 보도했다. 6월호 주요 내용을 소개하는 형식의 그 기사는 “그들이 딥 스로트(deep throat)라고 부르던 이가 바로 나다”라는 펠트의 고백을, 대리인인 손자 존 오코너의 말을 통해 전했다. 당시 91세의 펠트는 치매를 앓고 있었다. 가족들은 펠트가 누려야 할 온당한 명예와 함께 이후 책 출간과 인터뷰 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도 ‘커밍 아웃’의 목적 중 하나였다고 썼다.
그 33년 사이 워터게이트 사건을 소재로 한 다수의 책과 보도 등에서 펠트의 이름이 거론되곤 했고 그를 딥 스로트로 특정한 기사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펠트는 강력하게 부인하며 소송을 걸기도 했다. 배너티 페어 보도는, 다음 날 워터게이트 사건을 특종 보도한 워싱턴포스트가 사설을 통해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확증적 진실이 됐다.
사실이 드러나자 이번에는 그의 폭로 배경과 동기를 둘러싼 의혹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그 의혹은 펠트로선 대체로 불명예스러운 거였다. 아이다호대를 졸업한 펠트가 처음부터 정치적 야심가여서 1935년 민주당 상원의원 보좌진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42년 FBI 요원이 된 뒤 냉전기 에드거 후버 체제 하에서 본부와 지부를 오가며 주로 국내 안보 파트에서 승승장구해왔다는 점. 71년 7월 후버의 오른팔이던 클라이드 톨슨의 뒤를 이어 조직 내 2인자인 국내파트 담당 부국장으로 승진했는데, 닉슨이 후버 사망 후 차기 국장으로 유력시되던 그가 아니라 자기 심복인 패트릭 그레이 법무부 차관보를 국장에 임명한 일.
펠트는 매카시즘 시대의 조연으로 좌파ㆍ노동운동가 가택 불법 수색 등 인권침해 행위로 80년 유죄판결을 받았다가 레이건 행정부에서 사면 받은 전력이 있었다. 그의 제보로 퓰리처상을 탄 워싱턴포스트 밥 우드워드도 2005년 6월 2일자 기사를 통해 자신과 펠트의 인연을 설명하며 그가 “자신을 후버의 후계자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썼다. 그는 미국 민주주의와 인권운동 진영의 영웅이 되기에는 흠이 많았고, FBI와 보수권력층의 입장에서는 배신자였다.
그런 흠집내기는 제보의 진실과 무관하게 ‘순결한 딥 스로트’의 강박을 강화했다.
최윤필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