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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정

입력
2017.05.29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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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5월 30일

한국 1세대 여성 인권 운동가 이우정.
한국 1세대 여성 인권 운동가 이우정.

한국 여성운동이 독자적으로 조직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부터였다. 주로 종교ㆍ시민ㆍ노동운동 조직 내 ‘여성부’ 단위로 활동하던 진보 여성운동 진영은 1986년 부천서 성고문사건 대책협의회 활동을 계기로 이듬해 2월 한국여성단체연합(여연)을 결성했다. 여성단체들은 앞서 85년 3월의 제1회 ‘세계 여성의 날 기념 한국 여성대회’를 열었다. 당시 자료사진에 등장하는 ‘농축산물 수입 중단’ 같은 개별 단체 플래카드들이 보여주듯, 그건 여성운동이라기보다 기존 운동의 여성 버전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들은 85년의 여성노동자 생존권 연대와 86년 ‘KBS 시청료 거부운동’ 등을 통해 페미니즘 운동의 독자성을 획득해나갔다. 여연에는 민주화청년연합 여성부, 공해추방시민운동협의회 여성분과 등 지역과 부문 21개 여성조직이 가담했다. 초대회장으로 추대된 이가 한국 1세대 여성운동가 이우정(1923~2002)이었다.

1946년 조선신학원(한국신학대 전신)과 캐나다 토론토대 임마누엘칼리지에서 신학을 전공한 이우정은 한신대(1953~70), 서울여대(1972~76) 교수를 지내는 동안 대학서는 해방신학과 페미니즘을 강의하고, YMCA와 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 등을 통해 여성 노동인권 개선에 힘쓴 사회활동가였다. 그의 운동 ‘부문’은, 당시 사회운동이 대체로 그랬지만, 필연적으로 박정희 유신독재에 저항하는 정치운동이었고, 전태일 분신 이후 본격화한 노동운동이어야 했다. 그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과 76년 ‘3ㆍ1 명동구국선언’에도 이름을 올렸다. 다만 그는 반독재민주화라는 거대한 운동 안에서, 상대적으로 사소해 보였을 기생 관광 반대 운동과 성매매 추방운동,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활동 등 젠더 이슈의 끈을 놓지 않았다.

‘87 항쟁’ 이후 정치권(야권)의 유혹을 외면하던 그는 87년 김영삼의 3당 합당 직후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에 입당했고, 92년 14대 총선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됐다. 국회 여성특위 위원장으로 호주제 폐지, 공직 여성의무할당제 등에 힘을 쏟았다. 말년에는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으로 통일운동에도 힘을 보탰다. 그는 선구적 여성운동가였으나, 명성과 영향력을 탐낸 뭇 사회운동 진영의 요청을 외면 못한 ‘전방위 활동가’였다. 자칭 타칭 ‘스페어 타이어’라 불렸다고 한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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