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에 도착한 사연
부모 이어 새할머니도 외면
고아원, 절, 식모살이 전전
불행 끝내려 결혼 서둘렀지만
아이 보는 앞에서도 폭력 휘둘러
‘잘해야지’ 할수록 나빠지는 상황
막장 드라마 같은 제 인생 얘기 들어 주실래요? 엄마는 저를 낳자마자 떠났어요. 영영 돌아오지 않았어요. 아빠도 저를 나 몰라라 했어요. 할아버지, 새할머니랑 살았어요. 새할머니는 나쁜 사람이었어요. 저에게 집안일을 전부 시켰어요. 놀 시간도 없었어요. 친구들과 놀다가 집에 조금만 늦게 돌아가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어요. 마당에서 염소를 껴안고 웅크리고 잤어요. 새할머니가 제 옷을 전부 벗기고 강으로 끌고 가 빠뜨린 적도 있어요. 제가 도둑이니까 죽어야 한다면서요. 도와달라고 매달릴 사람도 없었어요.
초등학교 때 아빠와 새엄마가 저를 데리고 갔어요. 이제 살았구나 했지만 아빠는 며칠 만에 저를 때리기 시작했어요. 엄마처럼 새엄마도 떠났어요. 아빠는 저한테 화풀이 했어요. 쇠사슬로 저를 묶어 집에 가두고 마구 때리기도 했어요. 간신히 도망쳐서 경찰서에 갈 때마다 보호자인 아빠에게 돌아가라고 했어요. 어쩔 수 없이 새할머니를 찾아갔어요. 살려 달라고 무릎 꿇고 빌었지만 돈이 없어 안되겠다며 절에 보냈어요. 불경을 잘 외우지 못한다고 절에서도 많이 맞았어요. 또 도망쳤어요.
길에서 우연히 만난 아줌마가 같이 살자고 했어요.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집안일만 죽도록 시켰어요. 아이를 임신한 아줌마는 저를 고아원에 보냈어요. 아빠에게 연락했더니 그냥 고아원에서 지내라고 했어요. 자꾸 버려지고 여기저기 떠돌며 사는 게 너무나 불안하고 비참했어요.
새 인생을 살아보려고 서둘러 결혼했어요. 꿈이 또 깨졌어요. 남편은 술만 먹으면 저를 때렸어요. 임신 중일 때도요. 함께 살던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말리기는커녕 저를 구박했어요. 5년 전 겨울 이불 빨래를 하다가 갑자기 양수가 터져서 아이를 예정일보다 두 달 먼저 낳았어요. 아이를 지키려고 시댁과 멀리 떨어진 원룸을 구해 남편, 아이와 분가했어요. 시어머니는 툭하면 찾아와 생활비를 달라며 히스테리를 부렸어요. 남편은 스트레스를 받는다면서 저를 더 지독하게 때렸어요. 아이가 볼 때도요. 이웃 신고로 경찰이 올 때까지 맞는 게 일상이 됐어요. 자살도 이혼도 생각했지만 아이 때문에 그럴 수 없었어요.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제가 잘하면 언젠가는 다 좋아질 것 같아 안간힘을 썼어요. 하지만 남편이 도박에 빠져 사채까지 쓰면서 더 엉망이 됐어요. 아이는 언어 발달이 느리고 요즘엔 이상한 행동도 해요. 저는 왜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나요? 아이와 함께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이수민씨, 가명ㆍ32세ㆍ주부)
#한국일보의 도움말
늑대소굴서 자라 자존감 없고
‘껍데기 가족’ 집착해 학대 용인
아이에 똑 같은 인생 물려줄 판
병적 폭력-도박 치료 거부하면
무료 법률상담 통해 이혼 준비를
“수민씨 얘기를 듣고 눈물이 났어요. 너무나 가엾다는 말로는 아픈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네요. 수민씨가 직접 선택해서 겪은 일은 하나도 없으니까요. 벗어나고 싶다면 뭐가 잘못된 건지를 먼저 알아야 해요. 지금부터 그 얘기를 할게요.
수민씨는 자존감이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어요. 수민씨를 때리고 학대하고 버려도 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요. 수민씨는 존재 자체로 소중한 사람이에요. 생긴 모습이나 가진 것, 배운 것이 어떻든 사람은 언제나 존중 받아야 해요. 그런 사실을 수민씨는 배우지도 경험하지도 못했어요. 수민씨는 말하자면 늑대 소굴에서 살아왔으니까요. 가족은커녕 인간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이들에게 둘러싸여서요. 수민씨를 꼭 안아주고 아플 때 쓰다듬어 주고 괜찮느냐고 물어 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 테지요. 어머니가 낳자 마자 수민씨를 버린 건 아주 큰 상처로 남았을 거예요. 아버지도 사실상 수민씨를 유기했고요.
우리는 스스로 귀한 존재라고 느끼며 살아요. 숨을 쉴 때처럼 의식하지 않지만 그런 생각을 언제나 품고 있죠. 많든 적든 타인으로부터 사랑 받은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어요. 수민씨는 아니었죠. 그래서 ‘나는 이렇게 살면 안 되는 존재다, 누구도 감히 나에게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거예요.
수민씨가 새할머니를 다시 찾아가고 남편을 떠나지 못한 게 단지 사랑에 굶주려서라고 보는 건 맞지 않아요. 사랑을 갈구하는 건 기본적으로 사랑이 뭔지 알고 있을 때 가능한 일이거든요. 수민씨는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한 친절한 행동, 언제 다시 느낄지 모르는 단 한 방울의 따뜻함이라도 본능적으로 붙잡고 싶었던 거예요. 그거라도 없으면 죽을 것 같았을 테니까요. 수민씨에겐 진짜 가족이 없어요. 그래서 가족이라는 말이 가진 껍데기 같은 의미에 매달리고 있어요. 그래서 피를 나눈 아이는 물론이고 남편, 시어머니, 새할머니와 법적으로 맺은 가족 관계까지 지키려고 하지요.
좋은 부모를 갖지 못한 수민씨가 좋은 남편까지 만나지 못한 건 운이 나빠서였을까요? 속상하겠지만, 그렇지 않아요. 강박의 순환(Repetition Compulsion)이라는 개념이 있어요. 어릴 때 받은 상처나 충족되지 않은 욕구를 채우려고 자꾸 실수를 반복한다는 거예요. 특히 대인 관계에서 많이 그래요. 아버지 같은 사람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해 놓고 정작 닮은 사람과 사귀거나 결혼하는 경우가 많죠. 수민씨 남편도 아버지와 비슷해요. 어머니는 아버지에게서 도망쳤지만 수미씨는 그러지 못한 게 다르죠. 어머니가 차라리 수민씨를 데리고 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안타깝네요.
남편이 수민씨를 때리고 학대하고 도박에까지 빠진 건 그냥 실수가 아니에요. 병리적 증상이에요. 그런데 수민씨는 남편의 행동을 그저 참고 감당하려 해요. 그래야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라고 느끼니까요. 수민씨는 스스로의 취약한 면과 남편의 병적인 면이 요철처럼 꼭 들어맞는다고, 서로 필요한 존재라고 착각하고 있어요. 남편을 뒤치다꺼리 하면서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고 느끼기도 할 거예요. 자기 보상 심리죠. 수민씨는 너무나 힘들게 살아 왔어요. 그런 자신 안에 내재된 문제가 뭔지 깊이 생각해 보고 고치려고 노력해야 해요. 아니면 살면서 같은 문제가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어요.
수민씨와 아이를 위해 냉정하게 말할게요. 남편과 시어머니를 떠나세요. 그들은 이해와 존중 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예요. 과연 그들을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그들이 개과천선해서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은 없을 거에요. 경찰이 수없이 개입해도 달라지지 않아요. 착한 수민씨가 기다리고 인내하면 언젠가 바뀔 거라고 기대하지 말아요. 남편은 입원 치료를 같은 조치가 당장 필요한 상태입니다. 남편이 치료를 거부하고 시어머니가 돕지 않으면 당장 이혼하세요.
아이는 두려움에 떨고 있어요. 어린 수민씨처럼요. 아이에게 비상식적인 성장 환경과 그로 인한 처참한 불안을 물려줘선 안돼요. 자칫하면 아이도 수민씨 같은 인생을 살 수 있어요. 수민씨가 왜 남편을 떠나지 못하는지 이해해요. 하지만 무조건 떠나야 해요. 아이를 위해선 그래도 가정을 지키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그런 가정은 지킬 가치가 없어요. 아이에겐 늑대 소굴이나 다름 없어요. 엄마가 아빠에게 무력하게 맞고 당하는 걸 본 아이들은 아빠에겐 분노를, 엄마에겐 연민을 느낍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아이는 부부 간 힘의 균형에서 밀리는 엄마가 못나고 만만한 존재라고 여기고 깔아 보게 돼요. 엄마의 말이 점점 아이에게 통하지 않겠죠. 아빠 말은 무서우니까 듣긴 하지만 결국 제대로 된 부모와 어른이 없는 상태에서 자라게 됩니다.
부부 간 폭력에 대해 말해 둘게 있어요. 힘이 약한 배우자를 도구나 완력을 사용해 폭행하는 일이 한 번이라도 발생하면 ‘한번이니까, 너무 화가 났으니까’라고 넘어가선 안돼요. 한 번이 열 번, 백 번 된다는 말이 틀리지 않아요. 상식적인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 폭력을 쓰지 않아요. 배우자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고 싶다면 얼마나 엄청난 문제인지 진지하게 대화하고 부부 관계를 신중하게 재검토해야 합니다.
수민씨, 막상 이혼하려고 하면 두려울 거예요. 남편이 수민씨를 놔주려고 하지도 않겠죠. 하지만 용기를 내야 해요. 그게 수민씨와 아이를 지키는 길이에요. 당장 밥을 굶더라도 수민씨에게 없는 자존감을 만들어 가는 게 더 중요해요. 남편에게 맞을 때 수민씨가 느끼는 고통과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아이의 아픔은 크게 다르지 않아요. 아이도 자존감 없는 어른으로 클 가능성이 커요.
무료 법률 상담부터 받아 보세요. 이혼 절차와 준비할 것들에 대한 조언을 들으세요. 양육권 문제는 걱정하지 말아요. 배우자를 때린 사람에겐 절대 아이를 맡기지 않아요. 수민씨는 아마도 조언을 실행할 힘도 의지도 없는 상태일 거예요. 그럴수록 따끔하게 얘기해 주고 내면의 힘을 키워 줄 사람이 있어야 해요. 정신과 상담도 받는 게 좋겠어요. 비용이 부담된다면 지방자치단체나 교회 등의 프로그램을 알아 보세요.
수민씨에게 지금 제일 필요한 건 용기입니다. 조언해줄 사람은 많지만, 결국 행동하는 건 수민씨의 몫이니까요. 용기를 내는 게 수민씨와 아이의 자존감을 단단하게 만들어 가는 첫 걸음이라는 걸, 수민씨와 사랑하는 아이를 지키는 유일한 해법이라는 걸 명심하세요.
취재ㆍ정리=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지면을 통해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신청해 보세요. 사연은 한국일보 사이트(http://interview.hankookilbo.com/store/advice.zip)에서 상담신청서를 내려 받아 작성하신 후 이메일(advice@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 지면에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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