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첫 우울증 치료기 ‘마인드’
2㎃ 미세한 전류로 전두엽 자극
환자 96명서 증상 완화 확인
식약처 허가받아 임상에 활용
기기-스마트폰 앱과 연동시켜
병원이 복약 상황도 관리 가능
“중소기업 생존에 도움 되려면
신기술이 빨리 현장적용 돼야”
의료기술 규제 완화 호소도
우리나라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10년 넘게 부동의 1위다.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질환이 주요 자살 이유로 꼽힌다. 우울증으로 치료 받는 국내 환자는 약 60만명. 병원을 찾지 않는 잠재 환자는 이보다 적어도 10배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을 적극적으로 돌보지 않으면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 탈출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출신 젊은 공학도 3명이 뭉쳐 2013년 설립한 의료기기 벤처기업 ‘와이브레인’은 국내에 없던 혁신 기술로 우울증 치료에 도전하고 있다. 지난 22일 경기 성남시 판교 본사에서 만난 이기원(34) 와이브레인 대표의 손에는 곧 출시할 세계 최초 건식 미세전류 우울증 치료기가 들려 있었다. 이 대표는 “의료진에게는 신뢰도 높은 진료 데이터를 제공하고, 환자들에게는 편안하게 치료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줌으로써 우울증 감소에 기여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우울증 환자는 대개 뇌 앞쪽 전두엽 부위의 기능이 떨어져 판단력이나 집중력이 흐려진다. 전두엽이 이런 상태면 감정을 조절하는 부위인 편도체가 억제되지 못해 사소한 일에도 크게 화를 내거나 지나치게 우울해진다. 와이브레인이 개발한 치료기는 환자가 무게 150g의 헤드셋을 머리에 쓰면 뇌에 2밀리암페어(㎃)의 미세한 전류가 가해져 전두엽 신경세포들의 활동을 조절하는 원리다. 국내 우울증 환자 96명을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진행한 결과 대다수가 증상이 완화했다고 와이브레인 측은 설명했다.
전류 세기가 2㎃면 손에 닿았을 때 간질간질한 정도다. 이 중 약 20%만 두개골 내부로 들어간다. 전기로 뇌를 치료하는 기술은 1960년대 나왔지만, 당시 기기들의 전류 세기가 커 기억상실 같은 부작용 우려 때문에 쉽게 쓰이지 못했다. 당시 전류 세기는 와이브레인이 개발한 기기의 최소 100배 이상이었다. 이 대표는 “상용화한 뇌 전기 치료 기술 중 가장 낮은 에너지를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마인드(MINDD)’라고 이름 붙은 이 기기는 지난 3월 국내 첫 우울증 치료용 의료기기로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허가를 받았다. 현재 주요 대학병원 5곳에 도입돼 의사들이 연구용으로 실제 임상에 활용하고 있다.
의료계가 마인드에 주목하는 이유는 우수한 성능뿐 아니라 환자의 집과 병원을 연결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기 때문이다. 우울증 환자들은 대부분 약으로 증상을 조절하는데, 규칙적인 약 복용이 말처럼 쉽지 않다. 복약 여부나 증상의 정도 등을 이야기할 때 의사와 환자 간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약물치료에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반면 집에서 마인드를 사용하는 환자는 의사의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기기 내에 기록이 남는다. 또 하루 활동량이나 수면시간 등을 스마트폰 응용프로그램(앱)과 연동시켜 기기에 저장할 수 있다. 이런 데이터가 병원으로 전송되면 의사는 환자의 복약 상황과 증상, 생활습관 등 객관적인 정보를 토대로 상태를 판단할 수 있다. 이 대표는 “의료기기 회사로 출발했지만, 소프트웨어와 사물인터넷(IoT) 역량을 강화해 재택 연계ㆍ환자 관리 플랫폼을 자체 개발했다”고 말했다. 기술의 혁신성을 인정받아 와이브레인은 다수의 벤처캐피털로부터 총 100억원을 투자받았다.
이제 와이브레인은 환자들의 편의성 증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마인드 헤드셋의 전류 발생기는 전극에 식염수를 뿌려 작동시키는 방식이다. 인체 내로 전류가 들어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다. 하지만 환자의 머리가 젖게 돼 불편한 점이 있었다. 이에 와이브레인은 수분을 머금고 있지만 물이 묻어 나오지 않는 물질(하이드로 겔)로 전극을 덮었다. 이게 바로 건식 우울증 치료기다. “건식 기술은 외국에도 상용화한 제품이 없다”며 “현재 미국 뉴욕시립대와 임상연구를 진행 중”이라고 이 대표는 소개했다.
이 대표는 모바일 기기 소형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한동안 대기업에서 모바일 기기의 메모리를 만들었다. 그런데 우연히 다른 전공 동문들을 만난 자리에서 전기로 뇌를 치료하는 기술을 접하고 미련 없이 퇴사했다. 그는 “’공돌이’라면 누구나 생활을 바꿀 수 있는 제품을 만들고 싶다는 꿈이 있을 것”이라며 “세계적으로도 초기 기술이어서, 꿈을 펼쳐볼 만하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창업 당시를 회상했다.
제품 개발 시작부터 병원을 뚫기까지 4년여가 걸렸다. 상용화가 눈 앞인데, 환자들에게 직접 선택을 받으려면 신의료기술 제도를 통과해야 한다. 이미 식약처 허가를 받은 와이브레인 입장에선 중복 규제다. 이 대표는 “신기술을 현장에 빨리 적용할 수 있어야 중소기업의 생존에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며 규제 완화 필요성을 강조했다.
30여명 직원이 모두 20~40대의 젊은 층인 만큼 와이브레인은 업무 스타일이 여느 기업과 사뭇 다르다. 제품 인허가 등 민감한 문제를 포함한 모든 의사결정 과정을 사내 인터넷에 투명하게 공개한다. “뇌공학, 전자공학, 소프트웨어, 마케팅, 생산 등 다양한 전문인력들이 서로 존중하는 수평적 기업문화를 지향하기 위해서”라고 이 대표는 설명했다. KAIST 재학 시절 학내 음악동아리 보컬로 활동했던 그의 노래방 18번은 가수 전우성의 ‘만약에 말야’다. “만약 4년 전으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대기업보다는 창업을 택했을 것”이라고 이 대표는 힘주어 말했다.
성남=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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