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름을 1990년대 초반에 처음 접했다. 그는 서른 언저리에 영화전문 계간지 ‘영화언어’의 편집장이었다. 매우 학구적인 인물이라 생각했다. 몇 년 더 지나 '홍콩영화의 이해'(1995)라는 책으로 그의 이름을 다시 접했을 때 여간 아닌 영화마니아라는 느낌이 강했다.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가 출항할 무렵 그의 이름이 거론될 때는 당연하다고 여겼다.
언론사에 들어와 영화 분야를 담당하면서 그의 실체를 좀 더 알 수 있었다. 그는 부산에서 나고 자라 부산에서 대학을 나왔고, 대학원에서 영화를 배우기 위해 잠시 부산을 떠난 시기를 제외하면 죽 부산에서 살았다. 그는 부산예술대에서 후학을 기르고 영화평론 활동을 하다 부산영화제 창설에 나섰다. 부산 경성대 연극영화과에서 일했던 이용관 당시 중앙대 교수, 부산 지역 동료 평론가 전양준 등과 손을 맞잡았다. ‘한국에서 영화제라니, 서울도 아닌 부산에서라니’. 부산에서 영화제를 만든다는 소식이 처음 전해졌을 때 영화계의 지배적인 반응이었다.
부산영화제는 빠른 성장을 거듭했다. 쥐가 심사위원을 무는 황당한 일도 벌어졌던 낡은 남포동 극장가에서 출발해 2011년 우동에 영화의전당이라는, 근사한 보금자리까지 마련했다. 세계 영화인들이 한국에, 부산에, 한국영화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궁금해 할 정도로 부산영화제의 질주는 눈부셨다. 영화계의 신망이 두텁던 김동호 전 문화부 차관을 집행위원장으로 영입한 점이 주효했고, 프로그래머 등 여러 스태프의 열성이 큰 몫을 했다.
부산영화제가 아시아 간판 영화제로, 국내 대표 문화행사로 거듭나면서 김동호 이사장과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 등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영화제 창설을 준비하고 20년 넘게 아시아 영화 담당 프로그래머로 영화제를 위해 일했지만 그는 늘 뒤에 있었다. 하지만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부산영화제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영화인은 거의 없다. 그는 부산영화제의 보이지 않는 기둥이었다.
대중은 어떤 배우가 부산영화제를 찾았고 얼마나 많은 ‘별’들이 부산에 떴나에 더 눈길을 주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부산영화제의 정체성이 떠들썩한 레드카펫 행사도, 해운대 포장마차에서 벌어지는 영화인들의 술판이 될 수는 없다. 부산영화제는 우수 아시아 영화를 국내에 소개하고 해외에 알리기를 가장 큰 역할로 여긴다. 세계 영화계의 변방으로 여겨지는 태국과 인도네시아 네팔 부탄 우즈베키스탄 등에서 온 신작들과 신진 감독들은 부산을 도약대 삼아 세계로 나아간다.
미지의 아시아 영화들을, 미래의 아시아 거장들을 발굴하는, 부산영화제의 주요 임무는 그를 통해 수월하게 수행됐다. 2010년 ‘엉클 분미’로 칸 국제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태국 감독 아피차퐁 위라세타쿨, 논지 니미부트르, 펜엑 라타나루앙, 아딧야 아사랏, 칸이 사랑하는 필리핀 감독 브릴얀테 멘도사 등이 부산영화제로 한국을 찾았고, 세계로 진출했다. 그가 있었기에 영화 마니아들은 매년 발견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언론의 관심에서도 매번 뒷전이었던 그는 지난 18일(현지시간) 프랑스 칸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며 생애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다. 항도 부산이 아시아 영상 중심 도시라는 꿈을 잉태하는데 일조했고, 2005년 정부로부터 문화포장을 받는 영예도 누렸지만 그의 마지막 길은 아쉽고 쓸쓸하다. 2014년 세월호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다이빙벨’ 상영을 두고 시작된 부산영화제의 시련이 아직 끝나지 않아서다. ‘다이빙벨’ 파문을 거치며 그의 영화적 동지인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과 전양준 전 부집행위원장은 부산영화제를 떠났다. 남은 이와 떠난 이 사이에 패인 감정의 골이 아직 깊다.
그는 29일 영화의전당 중극장에서 열리는 영결식을 마지막으로 부산영화제와 작별한다. 그의 부재는 부산영화제 정상화의 필요성을 다시 일깨운다. 고(故) 김지석 부산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 겸 부집행위원장의 명복을 빈다.
라제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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