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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카터의 외교책사 브레진스키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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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카터의 외교책사 브레진스키 별세

입력
2017.05.2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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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내 이슬람 반군 적극 지원 등

70년대 말 대표적 반소련 강경파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 구명에 앞장서

2013년 10월 미 워싱턴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에서 열린 한 포럼에 참석한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왼쪽)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AFP 연합뉴스
2013년 10월 미 워싱턴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에서 열린 한 포럼에 참석한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왼쪽)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AFP 연합뉴스

1970년대 지미 카터 미국 행정부의 외교 책사이자 김대중 전 대통령 구명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별세했다. 향년 89세.

26일(현지시간) 브레진스키 전 보좌관의 딸 미카는 자신이 진행하는 MSNBC 정치전문 프로그램 ‘모닝 조’에서 “아버지가 평화롭게 영면에 들었다”며 “누구보다 헌신적이고 사랑이 넘치는 분이었다”고 애도했다. 브레진스키 전 보좌관은 자택 근처인 미 버지니아주 폴스처치의 한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함께 미국 외교가의 3대 거물로 꼽히던 그의 별세 소식에 카터 전 대통령,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 등은 “존경 받는 지성이자 훌륭한 동료였다”고 추모했다.

브레진스키 전 보좌관은 미ㆍ소 데탕트 시절에서 다시금 긴장이 격화하던 때에 미 행정부의 외교 전략을 이끌었다. 대표적인 반(反)소련 강경파인 그는 1977~1981년 재임 기간 구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전후로 중동 내 반소련 이슬람 반군을 적극 지원하는 동시에, 미ㆍ중 관계 정상화를 위해 전방위 외교를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한국에도 브레진스키 전 보좌관의 결정은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재임 4년차이던 1980년 10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파견한 한 장교를 맞이한다. 장교는 바로 ‘5ㆍ17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구명 운동에 대해 미 백악관의 입장을 파악하러 온 일종의 밀사였다. 김 전 대통령이 같은 해 9월 내란예비음모 혐의로 군법회의 1심에서 사형을 선고 받자 부인 이희호 여사는 백악관의 도움을 얻기 위해 비밀리에 접촉을 시도한 상황이었다. 이에 브레진스키 전 보좌관은 장교에게 “김(전 대통령)이 사형을 당하면 미국 내 수많은 (인권)단체가 항의시위를 분출할 것이며, 이 경우 북한에만 혜택이 돌아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듬해 1월 취임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결국 김 전 대통령의 감형을 조건으로 전 전 대통령의 방미를 수락했다. 브레진스키가 한국 정부와 막후 접촉에서 취한 입장이 결국 김 전 대통령의 구명에 중요한 발판으로 작용한 셈이다. 이러한 사실이 2005년 미국 기밀문서를 통해 공개되면서 한국 민주화에 있어 브레진스키의 역할에 대해 재평가가 이뤄졌다. 브레진스키는 퇴임 후에도 한국 지도자들이 미국을 방문할 때마다 자리를 함께 해 한미 동맹과 북핵 문제 등에 대해 조언했다.

김정원 기자 garden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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