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 우리나라에도 박쥐가 살고 있는 거야?’ 박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종종 듣게 되는 말입니다. 박쥐라는 동물은 이만큼 우리와 멀리 있는 동물로 여겨지는데요. 야간에 활동하고 동굴에서 잠을 자는 박쥐의 일반적인 모습도 이렇게 낯설어하는데, 열대 과일을 닮은 오렌지색 털을 가진 붉은박쥐(Myotis formosus)에 대한 이야기라면 어떨까요?
붉은박쥐, 너란 박쥐는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가 발표한 최근 자료에 의하면 남획과 기후변화 등으로 전 세계의 동식물 869종이 멸종됐고 1만7,000여종이 멸종 위기에 처해진 상황에서, 지구에서 사라져서는 안 되는 대체 불가능한 것으로 영장류, 박쥐, 벌, 균류, 플랑크톤을 지목했습니다. 이 가운데 박쥐는 곤충(해충)의 조절, 열대 우림 성장, 씨앗분산 등 지구생태계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라고 그 선정 이유를 밝혔습니다. 지구 생태계에서 해충조절이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오늘의 주인공 붉은박쥐. ‘붉은박쥐의 살아가는 이야기’는 동물의 살아가는 모습이 얼마나 다양한가를 보여주는 측면에서도 우리를 들뜨게 하지요.
한국에 살고 있는 23종의 박쥐 가운데 붉은박쥐는 멸종위기 1급종이면서 천연기념물(452호)로 지정돼 법적 보호를 받은 야생동물입니다. 서아프리카 지역에는 붉은박쥐와 꼭 닮은 Myotis welwitschii란 자매종이 살고 있습니다. 이 종은 열대우림, 고산지대, 사바나 지역의 관목림에서 나뭇가지에 매달려 잠을 자는데요. 반면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붉은박쥐는 자연동굴이나 폐광산에서 오랜 시간(약220일)동안 겨울잠을 자고, 겨울잠에서 깨어난 후 활동기간에는 산림으로 이동해 잠을 자곤 합니다. 떨어진 낙엽인 듯 열매인 듯 나뭇가지 끝이나 나뭇잎 사이에 매달려 잠을 자기도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분포하는 붉은박쥐는 애기박쥐과 가운데 열대의 기원을 가지고 온대지역에 살아남은 유일한 잔존종(殘存種)으로 평가됩니다. 빙하기 이전에는 유라시아 전 대륙에 분포했지만, 빙하기 이후 이곳에 살아남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생존을 위한 싸움, 붉은박쥐의 동면
붉은박쥐 생존전략의 8할은 잠자기입니다. 열대지역에 살았던 붉은박쥐에게 낮은 온도는 극복하기 어려운 스트레스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박쥐는 먹이자원이 고갈되고 온도가 낮아지는 시간 동안 동면을 하고 나머지 기간에만 활동하여 환경변화에 적응해왔습니다. 박쥐는 동일한 몸 크기의 설치류에 비해 세배 이상 오래 삽니다. 박쥐의 동면전략은 에너지 문제를 극복하는 것은 물론, 수명을 연장하는 데 기여합니다. 잠을 자는 행위 자체가 은신처에 숨어 있는 형태이기 때문에 야생에서 포식압(잡아 먹혀 개체수가 감소하는 일)을 낮추면서 수명을 연장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온대지역에 살고 있는 박쥐 종들은 기온이 낮아지고 먹이(곤충)량이 감소하는 기간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면을 합니다. 동면에 들어가기 전에 체중을 늘린(체중의 30~40% 증가) 후 먹이공급이 되지 않는 동면기 동안 에너지로 이용하는 거지요. 동면기 에너지 전략의 성패는 적합한 잠자리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때로 동면 수행 경험이 없는 새끼나 에너지 축적량이 적은 미숙한 개체들은 잠자리 선택을 잘 못해서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온대성 박쥐의 수면대사율은 온도와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박쥐는 종마다 선호하는 온도가 있고, 선호하는 온도와 일치되는 온도환경 속에서 동면을 수행할 때만 최저 에너지대사가 가능합니다. 잠자리의 온도가 갑자기 변화할 경우 박쥐의 체온과 동면처의 온도 차이가 크게 벌어지면서 잠을 깨게 되는데, 이때 에너지 소모율은 급증됩니다. 제한된 에너지로 동면을 수행해야 하는 박쥐가 에너지를 갑작스레 사용한 탓에 동면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사망할 수 있는 것이죠. 체내에 있던 에너지가 모두 소진되면 매달린 채 죽거나 바닥에 떨어져 죽기도 합니다.
열대 기원 종인 붉은박쥐의 생태는 북방 기원종과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북방종인 관코박쥐나 토끼박쥐는 온도선호도(영상 2~4도)가 낮은데 비해 붉은박쥐의 온도선호도(영상 12~14도)는 훨씬 높지요. 그러니까 붉은박쥐는 동면처의 온도가 영상 12~14도 일 때 최저대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온도는 물론 95%이상의 습도가 동면기간 내내 일정하게 유지되는 곳에서만 붉은박쥐는 220일간 안전하게 동면을 마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동면기간 에너지 전략은 생존과 직결되며, 생존전략은 최적의 동면처 선택에 집중하게 됩니다.
동면장소는 고온다습한 온도와 습도가 일정하게 유지되기 때문에 붉은박쥐는 자신의 체온을 조금만 낮추어도 이슬점이 형성됩니다. 붉은박쥐가 동면의 중반에 접어드는 1월 말에서 2월 초순이면 체온과 동면처의 온도차이가 커지면서 붉은박쥐의 몸 표면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거지요. 여름철 얼음물을 담은 컵의 표면에 이슬이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붉은박쥐는 이 때 잠꼬대처럼 자신의 팔꿈치와 날개에 매달린 물방울을 핥기도 합니다.
이렇게 치밀한 전략을 실행하는 붉은박쥐지만 잠자는 행동에 서툰 구석이 없진 않습니다. 붉은박쥐의 동면장소는 매우 안정적이지만, 체온 유지를 위해 다른 박쥐처럼 무리를 짓거나 암벽 틈이나 구멍 속으로 몸을 숨지기도 못합니다. 열대지역에서 잠을 자던 습성 그대로 허공에 몸을 드러낸 채, 독립적으로 하나 둘씩 동굴 벽이나 천정에 매달려 잠을 자지요. 산림이나 고목의 구멍을 잠자리로 이용하는 산림성박쥐의 민첩함도 붉은박쥐에게선 찾아볼 수 없습니다.
5월말 동면에서 깨어난 붉은박쥐는 동굴을 나와 숲에서 지내게 됩니다. 나뭇가지 끝이나 나뭇잎 사이에 매달려 잠을 잡니다. 밤이 되면 잠에서 깨어나 먹이활동을 하고 새벽에 다시 잠자리로 돌아옵니다.
암컷 붉은박쥐, 동면과 임신을 동시에
동면을 수행하는 동안 박쥐가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숙제는 번식에 관한 문제입니다. 동면에서 깨어나 먹이활동을 하고 번식 준비, 교미, 임신, 출산, 포육, 동면 준비 등 모든 과정을 활동기간 동안 끝내야 하기 때문이죠. 동면 전에 교미를 마친 암컷은 몸 속에 정자를 저장하거나(정자 저장형) 수정난 착상을 지연(지연형 착상)시켜 동면을 합니다. 교미 후 동면하는 암컷 일부는 임신 상태로 겨울을 지내야 하는 이중고를 겪게 되는 셈이지요. 온대지역에 살고 있는 박쥐는 동면에서 깨어나 6월말쯤 새끼를 낳곤 하는데, 붉은박쥐의 출산시기는 이보다 조금 늦는 것으로 분석됩니다.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체온을 낮추게 되면 에너지는 절약할 수 있지만, 번식에 나쁜 영향을 주게 돼 암컷은 수컷에 비해 보다 정교한 전략을 필요로 합니다. 동면말기에 배란이 시작되는 암컷은 수컷보다 서둘러 활동을 시작합니다.
붉은박쥐 암컷이 활동을 시작하는 5월 중순의 온도와 먹이자원 조건은 예측불가능하고 안정적이지 않습니다. 이 시기 번식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있는 암컷은 불안정한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체내에 여분의 에너지를 남기려 합니다. 따라서 암컷은 동면 초기엔 수컷에 비해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지만, 중반 이후 암컷은 에너지 소비량은 극도로 낮추는 전략을 사용합니다. 이에 비해 수컷의 에너지 전략은 단순해, 동면초기부터 말기까지 동일하게 에너지 배분을 합니다.
붉은박쥐는 동면을 선택함으로써 에너지 문제는 극복하는 대신 또 다른 위험성을 마주하게 됩니다. 동면기간 제한된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면대사율은 활동기보다 10% 이하로 낮췄고, 생리적 기능은 멈춤 상태로 죽음직전까지 끌고 가기 때문이지요. 면역기능은 거의 무방비상태로 동면을 합니다. 동면기간 세균 등에 감염되거나 서식지 내 질병이 발생하면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아예 없습니다. 이쯤 되면 붉은박쥐의 동면전략은 죽음을 담보한 생존격투기라 할만하지요. 붉은박쥐의 동면은 생존을 위한 치열한 시간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김선숙 국립생태원 생태기반연구실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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