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 EU와 협상에 앞서
국내 정치적 기반 다지기
“최저임금 10파운드로 인상”
보수당 親노동공약 쏟아내
노동당은 부자증세로 역전 시도
지지율 격차 5%p로 접근
주사위는 던져졌다. 10여일 앞(6월 8일)으로 다가온 영국 조기 총선에 세계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예정된 차기 총선은 2020년이지만, 테리사 메이(63)총리가 유럽연합(EU)과 2년 시한 브렉시트(영국의 EU탈퇴) 협상에 돌입하면서 전격 조기총선을 요청해 실시된다. EU와 협상에 좀더 당당하게 나서기 위해 국내 정치적 입지를 굳건히 하겠다는 게 메이 총리의 명분. 하원 650석 전원을 교체하는데, 현재 보수당(330석)은 노동당(229석)보다 100석 이상 많지만 가까스로 과반을 유지하고 있다. EU 단일시장과 관세동맹 이탈을 불사하는 ‘하드 브렉시트’를 천명한 메이 총리로서는, 단일시장 접근을 선호하는 당내 일부 의원들의 우려와 단일시장 접근ㆍ무관세 허용 조건을 브렉시트 협상 테이블에 반드시 올려야 한다는 야당의 반대를 ‘총선 압승’으로 돌파하겠다는 태세다.
노동자 표심 잡으려 보수ㆍ노동당 모두 좌향좌
지난 18일(현지시간) 메이 총리는 영국 중부 요크서 지방 인구 8만의 소도시 핼리팩스에서 ‘다함께, 전진(Forward, together)’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직접 총선 공약을 발표했다. 공약을 접한 국내외 선거 전문가들을 크게 놀랐다. 일찍이 보수당에서 볼 수 없었던 친(親)노동 공약을 제시했기 때문. ▦현재 7.5파운드인 최저임금을 2020년까지 10파운드로 인상 ▦가족 간병을 위한 1년 무급휴가 도입 ▦직업훈련을 위한 휴가 도입 ▦노동이사제 강화 등이 대표적이다. 조세와 복지정책 등에 있어서는 법인세율 인하(현행 19%→17%), 부가가치세 동결, 소득자산 조사 강화 등 전통 보수당 노선을 견지하고 있지만, 공개된 노동정책은 “메이 총리는 40년 이래 가장 왼편에 있는 보수당 총리”라는 영국 잡지 ‘스펙테이터’의 평가가 무색하지 않다. 뉴욕타임스(NYT)는 공약을 발표하는 메이 총리에게서 “사회주의 정치가의 발언을 접하는 느낌이라 해도 과장은 아니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공약을 발표한 장소도 상징적이다. 핼리팩스는 과거 번성했던 양모ㆍ담배공장들이 퇴락하고 있는 영국의 대표적 ‘러스트 벨트’도시. 1987년 총선 이후 30년 동안 7번 총선에서 모두 노동당이 승리했다. 메이 총리가 이 곳에서 공약을 발표한 것은 보수당의 의석 확보 제한선(off-limits)으로 간주돼 온 중ㆍ북부 공업지대를 공략하겠다는 의지 표명이기도 하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메이 총리는 지난해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가 단순히 EU라는 블럭을 떠나게 해달라는 표현이 아니라 세계화의 그늘에 남겨진 자들(left behind)의 ‘살려 달라’는 호소로 이해했다”며 “이번 총선 공약에는 사회와 정부의 역할을 인정하고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가 어우러져야 한다는 보수당의 이념적 전환이 담겨있다”고 평가했다.
철도ㆍ수도 국유화 등 전통 좌파노선을 고수하는 제레미 코빈(68) 대표의 노동당은 ‘소수가 아닌 다수를 위해(For the many not the few)’를 선거구호로 좀더 급진적인 공약들을 내놨다. 최저임금 인상(최소 10파운드ㆍ2020년)은 물론이고 ▦아빠의 육아휴가 2배 연장(4주) ▦법정 공휴일 4일 추가 ▦공공부문 ‘임금평등제(최고 임금과 최저 임금 격차 20배 제한)’도입 등을 내놨다. 여기에 법인세율 인상(19%→26%)과 연 8만 파운드 이상 소득자 소득세 인상 등 이른바 부자증세 공약으로 노동자 표심에 호소하고 있다. 브렉시트에 대해 명확한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노동당은 자신들의 강점인 노동ㆍ복지정책으로 선거쟁점을 이동시키겠다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노동당 예비 내각 소속 존 맥도넬 의원은 “중산층과 저임금 계층을 위한 정당은 노동당뿐이며 보수당은 슈퍼리치와 대기업을 위한 정당”이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보수당 압승이냐 노동당 대역전이냐
지난달 8일 메이 총리가 조기총선을 요청한 이후 보수당은 한 때 노동당보다 2배 높은 지지율(50%ㆍ4월 19일)을 기록하는 등 선거전 내내 노동당에 10%포인트 이상 앞서는 안정적 우세를 유지해 왔다. 총선 전초전격으로 치러진 지난 4일 지방선거에서도 청신호가 켜졌다.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86개 지역의회 의원 4,851명을 뽑는 이 선거에서 보수당은 이전 선거보다 563석 늘어난 1,899석을 차지(지지율 38%), 지난 40년간 영국 지방선거에서 집권당이 거둔 가장 큰 승리를 했다. 6월 조기 총선에서 보수당은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1997년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의 압승(145석 추가ㆍ하원 418석 차지)을 재현하느냐가 관심사로 떠올랐을 정도다.
다만 보수당이 복지재원 안정을 위한 복지공약을 발표한 이후 판세가 다소 흔들리고 있다. 100~300파운드에 달하는 연료수당 지급인원 축소, 저소득층 노인에 대한 요양보호서비스 제공 기준에 보유 주택가치 반영 등 ‘복지개혁안’이 보수당의 주요 지지층인 노인들의 불안감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야당이 보수당의 복지공약을 ‘치매세(dementia tax)도입’이라고 공격하면서 강고해보이던 보수당 지지율이 떨어졌다. 여기에 소수야당인 영국독립당과 자유민주당으로 분산됐던 표가 노동당으로 집결하면서 24~25일 보수당 지지도(43%)와 노동당 지지도(38%ㆍ더 타임스) 격차가 5%포인트까지 좁혀졌다.
막판 거센 추격에도 불구하고 노동당의 반전이 가능할지는 불투명하다. 정치전문 매체인 폴리티코 유럽은 “노동당 제레미 코빈의 선거캠프는 미국의 버니 샌더스나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과 같은 ‘아웃사이더’가 선전한 것에 고무돼 역전의 희망을 품고 있다”면서도 역전승은 ‘중력을 거스리는 일’과 같다고 진단했다. 22일 발생한 맨체스터 아레나 자살 폭탄 테러 역시 막판 판세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
안병억 대구대 국제관계학과 교수는 “실용을 중시하는 영국인들 특성상 브렉시트에 대한 입장이 불분명한 노동당, 브렉시트 재(再) 국민투표를 주장하는 자유민주당 등 야당이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쉽지 않아 보인다”며 “보수당이 현재보다 10~15석 이상만 추가하더라도 메이 총리가 국내 정치에 흔들리지 않고 브렉시트 협상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왕구 기자 fab4@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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