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권율은 ‘밀크남’의 대명사였다. tvN ‘식샤를 합시다2’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아침까지 준비해주는, 그야말로 부드럽고 자상한 남자였다. 그러던 그가 변했다. 상냥한 미소 뒤에 냉혈한 면모를 가진 교수(tvN 드라마 ‘싸우자 귀신아’)로, 내면의 탐욕을 드러내는 대기업 회장의 비서(영화 ‘사냥’)로 변신했다.
2007년 SBS 드라마 ‘달려라 고등어’(2007)로 데뷔한 권율은 영화 ‘내 깡패 같은 애인’(2010), ‘피에타’(2012), ‘식샤를 합시다2’(2015), MBC 드라마 ‘한 번 더 해피엔딩’(2016) 등을 통해 주연급 연기자로 성장했다. 특히 영화 ‘명량’(2014)에서 패배를 예상하는 전쟁에 나선 아버지 이순신의 아들 이회 역을 맡아 감정선을 세밀하게 연기해 호평받았다.
악랄한 캐릭터가 절정에 달한 건 SBS ‘귓속말’에서다. 그는 ‘귓속말’에서 서민과 어울릴 줄 아는 금수저 엘리트지만, 넘치는 야망으로 파멸에 치닫는 변호사 강정일을 연기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겪고 복수를 꿈꾸던 그는 법무법인 태백의 후계자 자리와 연인 최수연(박세영)의 사랑까지 잃은 채 살인교사 등의 혐의로 재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는다.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권율은 “연기하는 동안 감정적으로 나 자신을 극한의 상황까지 몰아붙여 심적인 부담이 컸다”고 말했다. 선하고 따뜻한 얼굴로 여성 팬을 끌어모으던 그가 왜 악랄해졌을까. 다음은 권율과의 일문일답.
-그동안 연기한 작품 중 최고로 감정이 휘몰아친 캐릭터가 아닌가.
“공격당하고 공격하는 치열한 핑퐁 게임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특히 다른 드라마보다 상대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일들을 표현해야 해 어려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적도, 누군가에게 흉기로 해를 가해본 적도 없으니 오롯이 상상에 맡겨야 했다. 드라마 속 설정이 허구인 것은 당연하지만, 보는 시청자에게 허구라는 생각이 안 들게 하고 싶었다. 그만큼 원래의 내 감정보다 두 세배로 더 느낌을 끌어내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해야 인물 속 감정이 조금이라도 공감되지 않을까. 특히 강정일은 한 회에서도 감정이 극과 극으로 요동치는데, 연기인데도 실제 굴욕감이 들기도 하고 화도 나더라. 휘몰아치는 감정을 쫓아가는 게 힘들기도 했다.”
-전작 tvN ‘싸우자 귀신아’에서는 사이코패스의 면모를 드러냈는데, 이번에 또 악역을 소화했다.
“강정일은 단편적인 악이라고 볼 수 없다. 캐릭터가 여러 일을 겪으며 악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있었고 그 과정을 이해시켜야 했다. 그게 전작의 사이코패스와 가장 큰 차이다. 단순하게 절대악의 색채만으로는 극 후반부까지 힘 있게 끌고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강정일의 악행을 정당화 할 수 없겠지만 목표를 향해 돌진해야 하는 그 나름의 이유를 설명하는 게 가장 큰 숙제였다.”
-결말은 만족하나. 장면에서 강정일이 감옥에서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는 것을 보고 ‘복수를 다짐하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물론 외국으로 떠나서 강정일이 한국 쪽 하늘을 바라보며 회상하는 장면이 있으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옥살이 중 푸시업을 열심히 해서 몸을 만들어 복수를 꿈꾼다거나 하는 상상도 든다.(웃음) 내 생각에는 강정일이 분명 뉘우치고 반성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모습을 시청자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반성했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고 옥살이 이후 앞으로 어떻게 달려 나갈 것인지, 그 이후를 준비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강정일은 성격상 그럴 수 있는 인물이다.”
-‘밀크남’으로 불렸는데, 요즘 부쩍 악역으로 만난다. 의도한 바가 있나.
“한창 로맨틱코미디 장르를 했을 때는 악역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안 먹어본 것이라 먹고 싶고, 안 가본 곳이라 가보고 싶은 그런 마음이었다. 늘 ‘밀크남’으로 불리니 새로운 이미지도 가져보고 싶더라. 그래서 처음 악역 섭외가 들어왔을 때 응했다. ‘귓속말’은 감독님이 영화 ‘사냥’을 보고 섭외를 마음먹었다더라. 연기 스펙트럼을 넓혀보겠다는 거창한 마음으로 악역에 도전한 것은 아니었다. 좋은 내용이라면 다음 작품으로 또 악역이 들어와도 적극적으로 임할 생각이다.”
-’권율의 재발견’이라는 칭찬이 들린다.
“감사한 칭찬이고 격려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드라마가 시청률이 잘 나와 따라올 수 있는 부수적인 칭찬이 아닌가 싶다. 극 중 악행을 저지르는 인물이라 가장 강렬해 그렇게 언급되는 듯하다. 배우 이보영과 이상윤이 극을 긴장감 넘치게 잘 끌고 온 게 쌓여서 내 캐릭터가 살았다. 다른 분들의 도움이 컸기 때문에 칭찬에 도취 돼 있지는 않는다.”
-어떤 연기자가 되고 싶나. 시청자가 알아줬으면 하는 면이 있나.
“계속 궁금한 배우가 되고 싶다. ‘저 배우에게 저런 면이 있었나’ 놀랄 수 있게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앞으로도 계속 ‘재발견’되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얘기다.(웃음)”
이소라 기자 wtnsora2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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