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를 수영하는 것도 벅찬데 곧바로 자전거를 40㎞ 타고, 마지막 10㎞는 두 발로 달린다. 일반인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운동량인데, 날마다 자신의 한계와 싸우는 ‘철인 소녀’가 있다. 하루에 5㎞ 수영을 하고, 사이클은 60㎞를 탄다. 쉬는 시간도 잠시, 10㎞를 더 뛴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금방 녹초가 된다. 그래도 어김 없이 철인 소녀의 시계는 새벽 5시30분부터 부지런히 돌아간다.
한국 트라이애슬론(철인3종)이 주목하는 18세 여고생 정혜림(온양여고)은 ‘특급 기대주’다. 중학교 3학년이던 2014년 2월 트라이애슬론을 처음 시작해 입문 5개월 만에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우승을 하며 한국 트라이애슬론 사상 최연소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그리고 그 해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혼성팀 경기에 나가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개인전은 국제 트라이애슬론연맹이 만 18세 이하 선수에겐 성인 무대 개인전(수영 1.5㎞ㆍ사이클 40㎞ㆍ달리기 10㎞) 출전을 금지하는 바람에 나서지 못했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역시 같은 이유로 불참했다.
정혜림이 처음부터 트라이애슬론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수영 선수 출신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친구를 따라 수영장에 갔다가 취미로 시작했고, 2학년 때부터 정식으로 운동 선수의 길을 걸었다. 초등학교 시절만 해도 장래희망으로 ‘수영 선수’를 적었다. 하지만 진로는 온양 용화중 시절 수영부 감독의 종목 전향 제의를 받고 트라이애슬론으로 바꿨다. 사실 수영보다 달리기를 더 좋아했던 소녀는 내심 흔쾌히 받아들였다. 또 때마침 KBS 예능프로그램 ‘남자의 자격’에서 배우 송일국이 트라이애슬론을 하는 방송을 보고 흠뻑 빠진 터였다.
우연히 시작한 트라이애슬론이지만 궁합은 정말 잘 맞았다. 2015년 6월 아시아선수권 주니어 1위, 2016년 4월 아시아선수권 혼성 릴레이ㆍ주니어 1위를 차지했다. 또 지난해 9월 멕시코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여자 주니어부에서는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트라이애슬론이 역대 세계선수권에서 따낸 첫 메달이다.
수영 750m, 사이클 20㎞, 달리기 5㎞ 코스를 소화하는 주니어부에서 수영을 18위로 마치고, 사이클을 소화할 때까지만 해도 16위였지만 가장 자신 있는 달리기에서 3위까지 치고 올라갔다.
정혜림은 지난 18일 본보와 인터뷰에서 “트라이애슬론은 내 인생을 바꿔준, 앞으로도 계속 바꿔나가야 할 종목”이라며 “정말 힘들지만 한계를 이겨내야만 승리할 수 있는 매력적인 스포츠”라고 밝혔다. 반복되는 강도 높은 훈련에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지만 그는 “심장이 정말 터질 것 같은데 몸이 거짓말처럼 움직이고 있더라”라고 덧붙였다.
트라이애슬론을 시작한 후 탄탄대로만 걸었을 것 같지만 그에게도 고비는 있었다. 정혜림은 가장 힘든 시기로 지난해 7월을 꼽았다. “당시 ‘중2병’ 같은 2차 성징이 오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배도 꼬여 운동을 못할 정도로 아프고 힘들었다. 정신을 꽉 잡고 훈련을 했는데 9월 세계선수권에서 동메달로 힘들게 했던 것의 결과물이 따라와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었다.”
운동 외적으로도 싸워야 할 것이 있다. 혼자 해외로 나가 현지에 있는 팀과 함께 훈련을 하다 보니까 말도 잘 안 통하고, 외로움을 많이 느끼기도 한다. 올해만 해도 1월부터 3월까지 미국에서 훈련을 했고, 지난 20일 다시 스페인으로 떠났다. 한국에 있었던 시간은 50여 일에 불과했다. 국내에 있던 기간에도 정혜림은 충북 진천선수촌에 있었다. 그는 “진천선수촌은 내 집처럼 여겨져 편하다”면서 “해외 전지훈련도 지금은 적응이 돼 괜찮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정혜림의 하루 일과는 ‘운동 또 운동’이다. 보통 새벽에 수영을 하고, 오전엔 사이클을 탄다. 오후 훈련은 달리기다. 정혜림은 “훈련 중간 휴식 시간이 꿀맛 같지만 그것보다 하루 일정을 잘 소화하고, 목표했던 기록이 나올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올림픽에 국내 최초로 여자 선수가 출전한다는 것이 대단하다고 하지만 정혜림의 목표는 단순히 올림픽 출전이 아니다. ‘톱 10’을 넘어 메달 획득을 목표로 세웠다. 한국 트라이애슬론은 세계 변방 중에 변방이다. 2012 런던 올림픽 때 허민호가 남자 종목에 최초로 출전했지만 55명의 출전 선수 중 최하위 54위(1명 실격)를 기록했을 정도다.
정혜림은 “도쿄 올림픽까지 남은 기간 더욱 성숙해지겠다”고 다짐했다. ‘트라이애슬론의 김연아’를 기대하는 주위 시선에 대해서는 “트라이애슬론이 인기가 많아지려면 내가 잘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서 “(김)연아 언니도 힘든 생활을 하고, 부상도 이겨내는 등 비인기 종목에서 정말 열심히 노력했던 모습을 닮고 싶다”고 강조했다.
김지섭기자 oni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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