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보통 사람의 목소리를 다 담는 ‘목소리 소설’을 하겠다는 뜻을 처음 밝혔을 때, 비평가들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꼽은 게 몇 가지 있습니다. 어떤 개인의 비극사, 혹은 연애사 같은 거죠. 그걸 기록하는 순간 당신은 3류 소설가가 된다고. 그러나 저는 그게 아니라면 왜 굳이 기록을 해야 할까 생각했습니다.”
24일 서강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연구소(소장 임지현) 주최로 이냐시오관 소강당에서 열린 토론회에 참석한 소설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담담하게 자신의 작품활동 초기를 되돌아 봤다. 승리했다던 2차 세계대전의 뒷모습, 그리고 공산주의 체제의 비인간성을 노출시키기 위해 알렉시예비치는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등의 소설을 펴냈고 2015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알렉시예비치는 40여년 동안 4,000여명의 평범한 사람들을 인터뷰해 이들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다 담는, 독특한 기법으로 주목받았다.
이 때문에 이날 토론회에는 ‘기억’ 문제에 관심 있는 임지현 서강대 교수의 주재로 우리나라의 기억 연구자들이 참여했다. 한국의 빈곤층 가정을 25년간 추적한 ‘사당동 더하기 25’로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던 조은 동국대 명예교수, 대하소설 ‘봄날’을 통해 광주민주항쟁의 문학적 재연 방식을 고민했던 임철우 소설가, 제주 4ㆍ3사건에 대한 구술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김은실 이화여대 교수가 토론자로 나서 ‘기억’과 ‘구술’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알렉시예비치는 수많은 사람을 인터뷰하면서 얻은 교훈은 하나였다고 했다. 바로 “정작 중요한 사실은 침묵된다”는 점. 의도적으로 감추는 경우도 있지만, 예상치 못한 엄청난 비극 앞에서 정말로 표현할 만한 적당한 언어를 못 찾아서이기도 했다.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알렉시예비치는 다큐멘터리나 르포가 아니라 문학을 하기로 했다. “아무리 훌륭한 다큐멘터리나 르포도 사물의 표면만 다룰 뿐이고 그 뒤 수많은 이슈는 문학이 건드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그의 글엔 저자의 개입이 최소화되어 있을 뿐 아니라 증언에도 유독 “잘 모르겠다” “설명하기 어렵다” 같은 표현이나 ‘말줄임표’나 ‘미처 마무리 되지 않은 문장’이 많다. 본격 문학처럼 애써 서사적 구조를 집어넣어 드라마틱하게 포장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목소리를 ‘불완전한 증언’이라 포기하지 않기 위해 쓰는 장치다. 알렉시예비치는 “이런 증언들은 나에게는 수백만장의 벽돌”이라면서 “이야기를 쭉 이어가다 서로 ‘고통의 온도’가 올라가고 있다고 느끼면 그 증언이 다소 불완전하다 해도 그 부분을 가져다 쓴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알렉시예비치는 국가의 공식기억에 반하는 일종의 대항기억을 만들어 온 셈인데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는 것이 더 나은 미래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특히 대상에 대한 깊은 공감을 서술의 밑바닥에 깔고 써나간다는 점에서 기억 문제에 관심있는 역사가들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고 말했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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