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등 대기업에서 총 592억 원의 뇌물을 받거나 요구ㆍ약속한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첫 재판이 23일 열렸다. 전직 대통령이 법정에 선 것은 전두환ㆍ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세 번째다. 불과 얼마 전까지 대통령 신분이었던 인사가 피고인으로 법정에 서게 된 것은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지 53일 만에 외부에 모습을 드러낸 박 전 대통령은 수갑을 찬 채 호송버스에서 내렸다. 수의 대신 남색 정장 차림이었지만 ‘503’이라는 수용자 번호가 적힌 배지가 달려 있었다. 초췌한 얼굴에 굳은 표정으로 법정에 들어선 박 전 대통령은 직업을 묻는 재판부 질문에 “무직”이라고 답했다. ‘40년 지기’인 최순실씨와 피고인석에 나란히 앉았지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지켜본 국민들은 국정농단의 엄중함, 권력의 무상함과 함께 법 앞의 평등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재판에서 박 전 대통령 측은 18개 혐의를 모두 부인하며 무죄를 주장했다. 대기업을 상대로 한 뇌물 요구를 비롯해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 청와대 기밀 문건 유출도 지시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검찰과 특검 수사에서 여러 물적 증거와 측근 진술 등을 통해 혐의의 상당 부분이 사실로 드러난 바 있다. 그런데도 박 전 대통령은 여전히 일체의 혐의를 부인하고만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공소사실 가운데 이미 명백히 사실로 드러난 것만이라도 우선 인정하고 선처를 구하는 것이 합리적일 터인데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부인과 억지 주장만 거듭하고 있으니 국민에게 사과하길 기대하기는 애초에 그른 셈이다.사상 초유의 국정농단으로 국가를 상당 기간 혼란에 빠뜨린 책임은 전적으로 박 전 대통령에게 있다. 그런데도 박 전 대통령은 그간 한 번도 국민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지 않았다. 뒤늦게라도 국민 앞에 진솔하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한때 국가지도자로서의 최소한의 도리임을 깨닫기 바란다.
이번 재판은 대통령의 권력 오ㆍ남용의 진상을 밝히고 이를 근거로 합당한 처벌이 이뤄지는 역사적인 자리다. 재판부는 예단이나 편견 없이 오직 증거와 법리에 따라 유ㆍ무죄를 가려야 한다. 재판부는 물론 검찰과 박 전 대통령 측도 이번 재판이 정의와 상식의 새 시대를 여는 출발점이 돼야 한다는 엄중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 현직 대통령을 비롯해 모든 공직자도 재판에서 스스로의 몸가짐을 바로 하는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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