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기로 결정한 뒤 궁궐을 어디에 짓느냐를 두고 많은 논쟁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궁궐의 위치를 선택하는 문제는 그 뒷배가 되는 산인 주산(主山)을 어느 산으로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지금 경복궁의 뒷산인 북악산 말고 그 서남쪽으로 늘어서 있는 인왕산과 안산도 후보로 거론되었다. 당시에 풍수 좀 안다는 사람들은 정궁의 위치를 놓고 갑론을박을 심하게 한 모양이다. 북악산을 반대한 이유도 흥미롭다. 주산의 모습이 약간 비틀어져 있어 장자계승이 어렵다거나, 왕족 간 골육상쟁이 이어질 것이라거나, 지금의 자하문 고개를 타고 살기 어린 바람이 들이친다는 주장도 전해온다. 지형에 따른 건축물 주변의 바람길이야 과학적으로 분석해 볼 여지가 있겠지만, 장자계승이나 골육상쟁이 뒷산의 위치와 형상 때문이라는 주장은 아무리 따져 봐도 잡설의 수준을 넘지는 못한다. 정작 조선왕조를 설계했던 정도전은 국가의 흥망성쇠가 지세에 좌우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조선왕조가 망하고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이 세워진 이래 그 행정수반인 대통령의 운명이 기구했던 이유를 청와대의 풍수로 설명하는 이도 있었다. 대통령이 머무는 곳의 터가 좋지 않아 다들 불행했다는 얘기이다. 한때는 대선 때마다 이름난 풍수꾼들이 유력 후보들의 집터나 조상묘를 찾아다니며 대권의 향배를 점쳤다는 기사가 심심찮게 나오기도 했었다. 그래 봐야 풍수는 풍수일 뿐이다. 국가와 지도자의 운명이 풍수가 아니라 국민의 의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민주주의가 과학에 훨씬 더 가깝다.
문재인 대통령은 집무실을 광화문으로 옮길 계획이다. 대통령과 국민의 거리가 그만큼 가까워질 테니 백 번 잘한 결정이다. 광화문에 새 집무실을 마련하는 일이 청와대로서는 골치 아프겠지만, 지금 청와대 부지를 다른 용도로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국민들의 마음은 무척 즐겁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인 지난 4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을 영입해 ‘서울역사문화벨트조성공약 기획위원회’ 위원장을 맡겼다. 당시 문재인 후보는 “청와대는 경복궁, 광화문, 서촌, 북촌, 종묘 이렇게 이어지는 역사문화거리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 거리는 미군기지가 물러나고 생태자연공원이 들어설 용산으로 이어져 “북악에서 경복궁, 광화문, 종묘, 용산, 한강까지 이어지는 그런 역사·문화·자연이 함께 어우러지는 그런 벨트가 조성”될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이 공약이 꼭 지켜지길 바란다. 현직 과학자로서 한 가지 욕심을 부린다면, 그 ‘문화’에 과학이 꼭 포함됐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과학은 경제발전을 위한 수단 내지는 언젠가 노벨상을 따서 국위를 선양하는 도구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 사회가 과학을 소비하는 방식은 즉흥적인 궁금증을 해결해 주는 도깨비 방망이 수준을 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과학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인류가 성취한 거대한 지적 구조물이다. 이 구조물은 꽤나 견고하고 쓸 만해서 인간이 오랫동안 품어왔던 의문들—인간과 우주의 기원에서부터 삼라만상의 작동원리에 이르기까지—에 가장 믿을만한 대답을 들려준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생물학적인 생존을 위해 먹고 사는 문제에만 만족하기 않는다. 우리가 호모 사피엔스인 이유는 근원에 대한 호기심의 끈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지적으로 충족해 왔기 때문이다. 내 개인적인 대중과학 활동의 경험을 돌아보면 2000년대 중반 이후 우리 사회의 과학에 대한 관심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웰빙(well-being)’의 시대에서 이제는 말하자면 ‘웰노잉(well-knowing)’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과학을 단편적인 지식으로 습득하기보다 하나의 문화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폭발적인 흥행은 우연이 아니다. 며칠 전에 새로 개관한 서울시립과학관에는 개관행사가 진행되는 3일 동안 연인원 2만 명이 다녀갔다. 과학을 일상의 문화로 즐기고 싶은 사람들의 욕구는 엄청나게 커졌다.
아쉽게도 이를 충족시킬 사회 인프라는 대단히 열악하다. 한국은 OECD국가 중 국립자연사박물관이 없는 유일한 나라이다. 국립자연사박물관 건립 논의는 20년도 넘게 표류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나는 보여주기식으로 박물관을 건립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박물관이나 과학관은 전시와 관람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연구와 교육이 뒷받침돼야만 성공할 수 있다.
지난 대선 때 정의당의 심상정 후보는 동네마다 과학센터를 설치하겠다고 공약했다. 다른 정당 후보의 공약이지만 나는 문재인 대통령이 이 정책만큼은 꼭 받아 안았으면 한다. 문재인 정부가 역점을 두고 있는 일자리 창출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거창한 과학관이나 박물관은 아니더라도 역사문화벨트의 한 자락에 조그만 ‘과학문화센터’가 한두 개라도 있었으면, 이왕이면 청와대 부지에도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 이젠 우리도 과학을 문화로 즐길 때가 됐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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