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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회 칼럼] ‘기계(The Machine)’는 모든 것을 읽는다

입력
2017.05.22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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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sees everything(그것은 모든 것을 본다)”. 미국 드라마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Person of Interest)’ (2011년 CBS 제작)가 시작될 때 나오는 대사 중 일부다. 여기서 ‘그것’은 주인공이 ‘인간을 닮게 훈련시킨’ 인공지능 ‘기계(The Machine)’를 가리킨다.

그 ‘기계’는 뉴욕 시의 모든 것을 ‘본다’. 더욱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읽는다’. 시민들의 핸드폰이나 곳곳에 설치된 CCTV, 사람과 사물 간 통신은 물론이고 사물과 사물 간 통신이 자율적으로 수행되는 만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 등은 ‘기계’가 뉴욕의 모든 것을 읽어 임박한 범죄의 연루자들 찾아내는 데 눈귀가 되고 손발이 된다. 그렇게 ‘기계’는 쉼 없이 하루 24시간 꼬박 뉴욕을 읽고 또 읽는다. 인간에게 뉴욕은 일상이 영위되는 삶터지만, ‘기계’에게 뉴욕은 모든 것을 읽어낼 수 있는 텍스트다.

그런데 ‘기계’가 처음은 아니었다. 일상을, 삶터를 죄다 읽어낼 수 있는 텍스트로 보고 가능한 최대치로 읽어내려 한 존재 말이다. 하루는 공자가 담담하게 말했다. “난 이제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 당시는 구두전승시대였다. 아무 말도 ‘듣지’ 못하면 진리는커녕 앎 자체에 접근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하여 말씀을 않겠다는 스승의 선언은 앎으로 생계를 꾸리고자 한 제자들에겐 커다란 타격이었다. 특히 말재주로 자기 경쟁력을 특화했던 자공에겐 청천벽력이었다. 얼른 만류에 나섰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무엇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공자가 답했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사계절이 운행되고 만물은 생육된다. 하늘이 대체 무슨 말을 하더냐?” 꼭 언어를 써야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말을 하는 궁극적 목표는 의사전달이다. 의사전달이 주이고 말은 수단이란 뜻이다. 따라서 의사전달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면 그 수단이 반드시 말일 필요는 없다. 하늘이 사계절의 운행과 만물의 생장을 통해 하늘의 뜻, 곧 천리를 충분히 전달하고 있듯이 말이다.

단적으로 시시각각 변이하는 자연현상이 바로 하늘이 자기 뜻을 전하는 매체라는 통찰이다. 진리를 구하고자 한다면, 그것에 기초한 유용한 앎을 얻고자 한다면 자연을 읽으면 된다는 깨우침이다. 자연은 애초부터 텍스트였다는 뜻이다. 또한 공자 당시 자연은 뭇사람의 일상이 펼쳐지던 삶터였다. 지금은 자연과 일상 사이에 근대문명이 빚어낸 인공적 삶터가 두텁게 자리하지만, 그때는 사회적 공간이 자연과 직접 겹쳐있던 시대였다. 그래서 자연이 텍스트인 것처럼 삶터 모두가 텍스트였다.

비단 공자만이 아니었다. 인류 역사는 실은 삶터를 끊임없이 읽어왔기에 가능했다. 주어진 삶의 여건을 치열하게 읽지 않으면 번식은커녕 생존조차 불가능한 게 인류에게 주어진 기본사양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사회 그러니까 무리를 이루고 살다 보니 그 역할을 무리 가운데 뛰어난 이에게 위임하곤 했다. 우리가 성인이니 위인이니 하며 기리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삶터를 공평무사하게 읽어낸 바를 입말로 전했고, 문명 수준이 뒷받침되자 책을 써서 글말로 유포했다. 사람들은 그렇게 그들이 전한 바를 읽음으로써 삶터에 대한 앎을 지니게 되었다.

문제는 이에 길들여져 사람들이 책을 읽는 데서 멈추고 만다는 점이다. 4백여 년 가량 존속한 한(漢) 제국이 멸망한 주된 원인은 의론만 장황하게 펼쳐냈던, 그래서 공허하기 그지없게 된 제국의 학문 풍토였다. 천 수백 년 후 명조가 만주의 청에게 멸절된 주요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재에 들어앉아 선현이 남긴 책으로만 우주자연, 인간만사의 섭리를 들입다 팠던 공소한 학풍 탓이었다. 간단없이 살아 움직이는 삶터를, 거기서 생동하는 일상을 생생하게 읽어내는 일을 등한시했기에 초래된 결과였다.

읽어야 할 텍스트로서의 삶터가 자연 하나였을 때도 이러했는데, 거기에 더하여 인공적 삶터도 읽어야 하는 지금은 어떠할까. 자연과 직접 접속하지 않고서도 일생을 너끈히 보낼 수 있는 지금, ‘스마트’한 첨단 기기들에 이미 충분히 길들여져 그들을 통해서만 앎에 접속하고자 하는 지금, 삶터 읽기를 과연 예전처럼 직접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아니, 적어도 정보 수집과 분석, 이에 기초한 문제 처리 능력에서만큼은 인공지능을 장착한 기계가 인간을 능가하고도 남을 미래사회에선 또 어떻게 될까.

각자가 직접 일상과 삶터를 치열하게 읽어야 하는 이유다. 그렇지 않으면 기계가 던져주는 앎만 접하게 된다. 어쩌면 이미 기계는 모든 것을 읽고 인간은 그것이 제공하는 바만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기계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가 인간을 사육하는 이율배반의 일상화! 영화 ‘매트릭스’에서처럼 인간이 그저 36도짜리 발열기관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힘들어도 삶터란 텍스트를 치열하게 읽을 수밖에 없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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