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개 종파가 의석 나누는 쿼터제
개정 필요한데 셈법 달라 합의 요원
의회는 “시리아 내전 탓” 핑계
두 차례 선거 연기 후 정쟁만
법안 처리도 못해 전력난 등 불편
분노한 민심 반정부 단체에 결집
“그들(국회의원)이 세 번째 임기 연장안에 투표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모두 사라질 겁니다.”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성조세프대학교에 재학 중인 라메즈 다고르(23)는 레바논 의회가 어떻게 지난 4년간 차일피일 선거를 미뤄왔는지 설명하며 울분을 토했다. 대학교 입학 전부터 정치전문 블로그 ‘모라하잣’을 운영, 인기 블로거로 주목 받고 있지만, 정작 그는 대학 졸업을 1년 앞둔 지금까지 단 한번도 투표에 참여하지 못했다. 레바논 헌법은 4년마다 새로운 의회를 선출하도록 돼 있지만 의원들은 2009년 6월 이후 일절 국민의 심판을 받지 않은 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고르는 이에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해야할 일을 제외한 모든 일을 하며 권리만 누리고 있다”며 “레바논은 늑장 공화국(Republic of Procrastination)”이라고 조소했다.
레바논 국민들이 21일 약 8년 만에 열리는 총선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당초 예정된 선거 일자는 2013년 5월이었지만 의회가 두 번에 걸쳐 각각 17개월, 31개월 선거를 연기했기 때문이다. 물론 의원들의 임기도 그만큼 연장됐다. 정치권이 내놓는 총선 연기 명분은 이웃 국가인 시리아 내전으로 인한 위기이지만 실제로는 선거법 개정을 위한 정파간 합의 불발 때문이다. 종교ㆍ종파별로 구획 지어 놓은 의석 배당 체제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주요 정당들이 기존 의석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대립하는 사이 국민들은 ‘이제는 제발 투표하자’고 외치고 있다.
18개 종파의 ‘공정한’ 의석 배분?
의회가 새로운 선거법을 마련하지 못하고 공전을 거듭하는 가장 큰 원인은 과거 갈등 방지를 위해 만들어둔 종파별 의석 쿼터제에 있다. 레바논은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주요 종파만 18개인 다(多)종교 국가다. 정당도 이와 밀접히 연계된 가운데, 1989년 내전 종식을 위해 체결한 타이프협약(국민화해헌장)을 바탕으로 개헌(1990년)한 이래 전체 128석의 의석을 기독교와 이슬람교에 정확히 절반씩 배분했다. 각 64석은 다시 마론파(기독교), 수니파(이슬람), 시아파(이슬람) 등으로 세부 배당된다. 이처럼 ‘정치적 균형’을 만들겠다는 의지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원집정부제 하 주요 요직의 종파도 헌법에 규정돼 있어, 대통령은 마론파, 총리는 수니파, 국회의장은 시아파에서 선출된다.
하지만 28년 전 이뤄진 레바논 사회의 합의는 오늘날 사실상 기계적 균형 맞추기 수단으로 전락했다. 현재 레바논 인구 중 기독교도 비율은 절반에 한참 못 미치는 35~40%가량이다. 현지 여론조사업체 스태티스틱스레바논에 따르면 2015년 기준 마론파 등 12개 기독교 종파 인구는 35.5%, 이슬람교 신도는 56.3% 정도다. 실제 인구 구성과 동떨어진 의석 배분이 표심을 상당 부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의석의 비례성을 높이는 새로운 선거법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가 조성됐으나 배분 비율과 방식을 놓고 정당 간 충돌이 이어지고 있다. 시아파 무장정파인 헤즈볼라는 온전한 비례대표제를 주장하는 반면, 마론파 최대 정당이자 미셸 아운 대통령이 소속된 자유애국운동(FPM)과 사드 알하리리 총리의 미래운동(FMㆍ수니파) 등은 비례대표ㆍ다수제 혼합 형태를 고집하는 식이다.
과연 이번 선거 전까지 선거법 개정 합의에 다다를 수 있을까. 다수 현지 언론을 종합하면 답은 ‘아니오’다. 4월 12일 아운 대통령이 더 이상의 의회 임기 연장을 막기 위해 지난 15일까지 한 달간 휴회를 감행했지만 또다시 원내 정당 간 합의가 불발됐다(18일 현재). 로이터통신은 이에 “레바논이 사상 처음으로 의회 실종 상태로 돌입할 위기에 처해 있다”며 “(회기 마감인) 6월 20일을 넘어선 임기 연장이 불가피해 보인다”고 예상했다. 알리 하산 카릴 재무장관도 로이터통신과 인터뷰에서 “지금은 타이프협약 이래 레바논의 가장 시급한 위기”라며 “개헌 이전 시기부터 통틀어 의회 공백 사태가 이렇게 가까워진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민생은 뒷전…최대 피해는 시리아 난민
정치권이 기득권을 지키려는 정쟁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 민생은 무너지고 있다. 의회의 법안 처리 속도가 현저히 느려지면서 2015~2016년에는 수도 베이루트 등지의 쓰레기조차 처리하지 못해 길가에 오물이 넘치는 ‘쓰레기 대란’도 발생했다. 만성적인 전력난을 타개하기 위해 오랫동안 전력시장 개혁 논의가 이어져왔지만 올해 3월 의회는 국민들에게 큰 부담을 지우는 전력 수급안을 통과시키면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레바논 정부와 의회는 여론의 비난을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 선거 연기 사태 원인을 자국으로 피신한 시리아 난민들에게 화살을 돌리고 있다. 전력시장 개혁 당시 에너지 당국은 “(시리아) 난민 위기가 없었다면 레바논은 (개혁 목표였던) 24시간 전력 수급을 일찍이 달성했을 것”이라고 둘러댔다. 의회와 내각에서는 최근 레바논 내 시리아 난민들로 인한 사회 혼란 및 경제적 위기에 대한 발언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하리리 총리는 연일 “레바논의 최대 과제는 시리아 난민”(4월 21일), “난민 위기가 레바논을 짓누르고 있다”(5월 15일)는 등 난민 위협을 부각하고 있다. 시리아 난민 유입이 끊이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전부터 지속돼 온 문제라는 점에서 이런 발언들은 의회의 무능력을 감추기 위한 레토릭에 불과하다는 비난이 거세지고 있다.
정치권의 소모적 논쟁에 지친 일부 유권자들은 점차 반정부 단체들을 중심으로 결집하고 있다. 2015년 쓰레기 파동 때 결성된 후 현재 의회 시스템 및 부패에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는 ‘유 스팅크(You Stinkㆍ악취가 진동한다)’ 운동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투표 기회가 없다 보니 자신들의 대변자를 원내에 진입시키기조차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저명한 극작가 겸 영화감독이자 유 스팅크 활동가인 뤼시앵 부제이리는 “우린 악순환에 갇혀있다”며 “진짜 변화를 가져올 후보에 힘을 실으며 선거를 기다리다 이러한 변화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의회에 가로 막히길 반복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김정원 기자 garden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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