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대통령 기념사 때 25번 박수
유족 울분 곳곳서 터지던
예전 풍경과는 전혀 딴판
식 마친 뒤 20분이나 묘역 참배
참배객들 몰려 다니며 사진 촬영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때
한국당 지도부는 입 다문 채 있어
“49분간의 위로였고, 선물이었습니다.”
18일 오전 광주 국립 5ㆍ18민주묘지. 5ㆍ18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식이 끝난 뒤 지팡이를 짚고 남동생의 묘를 찾아가던 소복차림의 유족 최옥순(77)씨는 이날 49분간 거행된 기념식 소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제삿날에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건 처음”이라며 “올해 기념식에선 정부로부터 홀대를 받지 않아서 좋았다”고 했다.
5ㆍ18기념식이 역대 최대 규모로 차분하게 치러졌다. 9년 만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제창됐고, 문재인 대통령이 기념사를 읽어내려 가는 동안 기념식장엔 박수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정부의 푸대접 논란으로 기념식장엔 긴장감이 감돌고, 유족들의 울분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던 예년의 기념식 풍경과는 딴판이었다.
실제 올해 기념식은 파격의 연속이라 할만 했다. 문 대통령의 기념식장 등장이 그 시작을 알렸다. 문 대통령은 이날 기념식 시작 4분 전인 오전 9시56분 묘지 내 ‘민주의 문’을 통해 300여m를 걸어서 식장에 들어섰다. 역대 대통령들이 식장 좌측 유영봉안소 쪽에서 몰래 ‘옆으로’ 들어가던 것과는 달랐다. 추념문까지 양쪽으로 도열해 있던 참배객들 사이에선 “문재인”, “사랑합니다”라는 외침이 흘러나왔다. 기념식 참석자들의 식장 입장도 달랐다. 올해는 예년과 달리 초대장과 비표, 신분증 없이도 보안검색대만 통과하면 참석할 수 있었다.
기념식장 속 낯선 장면은 문 대통령의 기념사 낭독 때도 연출됐다. “오월 광주의 정신으로 민주주의를 지켜주신 광주시민과 전남도민 여러분께 각별한 존경의 말씀을 드린다”, “5ㆍ18 진상을 규명하는 데 더욱 큰 노력을 기울이겠다.” 문 대통령이 광주의 상처와 아픔을 어루만져주고, 국민통합을 바라는 내용의 기념사를 읽어내려 가는 동안 식장에선 무려 25번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1980년 5월 18일 태어난 날, 계엄군의 총탄에 아버지를 잃었던 5ㆍ18둥이인 김소형(37)씨가 ‘눈물의 추모사’를 읽을 때, 문 대통령은 눈물을 훔쳤고, 단상에서 퇴장하는 김씨를 뒤따라가 직접 안아주기도 했다. 유족 조정숙(67)씨는 “기념식장에서 박수를 쳐본 것도 처음”이라며 “오늘 기념식 주인공은 유족들이 아니라 문 대통령이다”고 웃었다.
기념공연도 보수정권이 집권하던 지난 10년간의 그것과 확연히 달랐다. 총 3막으로 이뤄진 공연에선 가수 권진원씨와 전인권씨의 민중가요 무대가 펼쳐지면서, 지난해 20분도 안 됐던 기념식이 2배가 넘는 49분간 진행됐다.
기념식 마지막 순서인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때도 그간의 관례를 깨뜨리는 풍경이 이어졌다. 문 대통령이 작곡가인 김종률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 등 참석자들과 나란히 서서 손을 잡은 채 노래를 함께 불렀다. 다만, 보수단체를 의식한 듯 주먹을 쥐고 흔들지 않고 맞잡은 손을 아래로 내린 채 앞뒤로 흔들기만 했다. 정우택 자유한국당 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 이현재 정책위의장, 박맹우 사무총장 등 한국당 지도부는 제창 내내 행진곡을 따라 부르지 않고 입을 다문 채 서 있기만 하는 대조적 모습을 보였다. 기념식이 끝난 뒤 문 대통령이 20분간이나 묘역 순례에 나선 데다, 참배객들이 문 대통령의 동선을 따라 몰려다니며 사진을 찍는 모습도 색다른 풍경이었다. 김영국(59)씨는 “모처럼 정부가 5ㆍ18을 제대로 대접하는 것 같아 기쁘다”며 “그러나 자칫 파격적인 기념식 풍경이 보수층을 중심으로 또 다른 지역주의로 비화하지 않을까 우려도 된다”고 말했다.
광주=안경호 기자 k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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