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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 Do Not 리스트] ⑥기업인 만나되 독대하지 마라

입력
2017.05.1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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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박정희 시대 머무른 박근혜

기업 총수 독대하며 모금요구

특혜와 반대급부 악순환 이어져

경제 살리기ㆍ일자리 창출 위해

기업과 적극적 소통 필요하지만

공개적으로 투명하게 이뤄져야

역사학자들이 TV에서 방영되는 사극(史劇)의 대표적인 왜곡 사례로 꼽는 것이 왕과 신하의 독대 장면이다. 드라마 속의 독대에선 국정에 대한 긴밀한 논의가 이뤄지기도 하지만, 음모가 싹트고 때로는 흥정과 거래가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왕들이 신하와 독대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했고, 매우 드문 일이었다. 실록을 적는 사관이나 승정원일기를 적는 주사 등 기록자의 배석 없이 왕은 누구도 만날 수 없었다. 신하가 왕에게 독대를 요청한 사실이 알려지면 상대 당파의 공격 대상이 됐다. 그래서 독대는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독대가 낳는 부작용을 이미 선조들은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왕을 견제하고, 비선이 생길 틈을 주지 않았던 이런 문화는 조선 왕조가 500년 넘게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로 꼽히기도 한다.

그런데 왕조 시대에도 금시기 됐던 독대가 현대에 들어서 오히려 일반화됐다. 특히 권력자와 재벌 총수의 개별만남은 정경유착의 폐해로 이어졌다.

군사정권 시절 독대 ‘정경유착 심화’

시작은 1961년 5ㆍ16 쿠데타 직후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독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박 대통령은 기업인들에게 공장을 건립하고, 단체를 만들어 정부의 산업정책에 협력할 것을 요구했다. 대신 부정축재자로 몰렸던 기업인들을 처벌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이 때 탄생한 것이 전국경제인연합회다. 박정희 정권은 이후 재벌 기업들에게 세금ㆍ금융 혜택과 시장 독점권을 보장해줬고, 그 대가로 전경련은 정치자금을 조달해 정권에 건넸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 때도 이런 흐름은 이어졌다. 전두환 대통령은 재임 기간 중 기업들로부터 받은 돈이 9,500억원에 달했고, 직접 상납받은 금액도 2,000억원이 넘었다.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 등과의 독대에서 돈이 오갔다.

노태우 대통령 역시 2,850억원의 돈을 기업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는데, 그 대가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 등과 수차례 독대하며 대형 국책공사를 맡긴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서 되살아난 재벌 독대

재계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정부를 거치면서 대통령과 재벌 총수들의 독대 관행이 줄기 시작해 노무현 정부 때 거의 없어졌다고 평가한다. 오히려 노무현 대통령이 기업인들과의 독대를 꺼리면서 정권과 대기업 간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는 볼멘소리가 재계에서 나올 정도였다. 대기업 최고경영자(CEO) 출신인 이명박 대통령도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치며 친기업 정책을 펼쳤지만, 독대 보다는 대규모 회의나 간담회를 활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구시대 유물로 여겨졌던 재벌 총수 독대가 박근혜 정부에서 되살아난 것은 기업에 대한 시각이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 집권 당시에 머물렀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들을 정부가 이끄는 대로 따라와야 하는 존재로 여겼는데, 이는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이 추구한 국가주도 개발경제 시절의 문화이자 병폐였다”며 “당시 당연시 됐던 정경유착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혀 없었고, 기업을 부려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한 것이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업인들을 만날 때 독대 형식을 취한 것도 박정희 대통령의 방식을 모방한 것이 아니었겠냐”고 덧붙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5~2016년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주요 기업 총수들과 단독 면담하며 미르ㆍK스포츠 재단 모금을 요구했고, 최순실의 개인 민원을 해결하려 했다.

이 같은 독대는 법과 제도를 무력화시키는 부작용을 낳는다. 전직 정부 관계자는 “재벌 총수와 대통령이 독대하면 필연적으로 개별 기업의 현안과 애로 사항을 들을 수 밖에 없다. 대부분 정당한 법 절차로 해결되지 않는 것들인데, 해법을 찾다 보면 반드시 특혜로 이어지고, 반대급부를 요구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경협조 필요…공개적으로 투명하게 만나야”

전문가들은 경제 살리기와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는 새 대통령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기업과 소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준선 성균관대 교수는 “정부가 대형 프로젝트를 시행하려면 결국 재무적으로 여력이 있는 대기업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다”며 “정경유착이 아니라 정경협조가 필요한데, 정부와 기업인이 만날 때는 독대가 아니라 다수가 공개적으로 만나는 방식으로 정경유착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기업이 투자하도록 강요하는 게 아니라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고, 승자가 충분히 보상받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며 “정부와 기업인의 만남은 독대가 아니라 공개적으로 투명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기업인을 만나는 것도 굳이 대통령이 할 게 아니라 경제를 잘 아는 경제부총리나 청와대 정책실장, 장관 등이 만나는 게 효율적”이라며 “다만 개별기업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경제계 전반의 일반적인 룰에 대한 의견 교환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한준규 기자 manbok@hankookilbo.com

고경석 기자 kave@hankookilbo.com

지난 2015년 삼성전자 반도체 평택공장 기공식에 참석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이야기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 2015년 삼성전자 반도체 평택공장 기공식에 참석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이야기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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