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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 Do Not 리스트] ④이전 정부 흔적 지우기에 힘 빼지 마라

입력
2017.05.1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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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노무현 정부는 2006년 8월 ‘비전 2030’이라는 중장기 국가발전 대책을 발표했다. 20년 이상을 내다보고 만든 역대 정부 최초의 중장기 청사진이었다. 비전 2030은 ‘저출산ㆍ고령화, 양극화 등 새로운 도전을 맞아 성장과 복지가 함께 가는 동반 성장을 해야 한다’는 목표의식 하에 2030년까지의 추진 과제를 담고 있었다.

당시 이 비전을 마련하는 데는 적잖은 시간과 자원이 들어갔다. 1년여간 각종 국책연구기관 연구원과 대학 교수 등 전문가 60여명이 60차례 넘는 토론회와 5차례에 걸친 세미나를 열었고, 예산 편성 권한을 쥔 당시 기획예산처(현 기획재정부)가 큰 골격의 필요 재원도 추산했다.

하지만 당시는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를 불과 6개월 앞둔 시점. 보수 진영에서는 “정권이 바뀌면 없던 일이 될 텐데, 왜 무리하는지 모르겠다”는 회의적인 반응이 쏟아졌고, 실제 이듬해 들어선 이명박 정부는 비전 2030을 사실상 백지화했다. 비전 2030 수립에 관여했던 한 고위 공무원은 “당시 노 대통령이 이명박 당선인에게 손수 비전 2030 보고서를 건네며 ‘앞으로 참조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소용없었다”면서 “저출산ㆍ고령화 등 비전 2030에서 제시한 해결 과제가 이명박 정부에서 진지하게 다뤄졌다면 저출산 문제가 지금처럼 심각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전 정권의 정책 기조가 홀대 받는 것은 ‘정권 재창출’ 때도 마찬가지다. 이명박 정부가 성장동력으로 내건 ‘녹색 성장’은 박근혜 정부 들어서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다. 이명박 정부는 선제적으로 저탄소녹색성장기본법을 제정하고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를 도입하며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국제 기구인 글로벌녹색성장위원회(GGGI)를 주도적으로 설립하고 녹색기후기금(GCF)을 인천 송도에 유치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 들어 대통령 직속이던 녹색성장위원회는 총리실 소속으로 격하됐고, 각 부처들에 있던 녹색 성장 조직도 하나 둘 없어졌다.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는 2015년 시행을 앞두고 시행 강도가 대폭 낮아졌다. 하지만 정부 부처 공무원들 사이에선 “녹색 성장의 일부라도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져왔다면 전기차나 태양광 개발에 대응하는 속도가 좀 더 빨랐을 것”이란 지적이 지금도 끊이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이후 새로운 정책들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대통령 직속으로 일자리위원회를 설치하고, 공공기관에 비정규직 제로를 선언하고, 적폐 대상으로 꼽혀온 국정교과서 폐지를 지시했다. 15일엔 미세먼지 대책도 내놓았다. 하나 하나 문재인 정부의 색깔이 잔뜩 묻어난다.

전문가들은 국정교과서처럼 박근혜 정부의 정책을 180도 뒤집는 것들도 반드시 필요하겠지만, 계승할 가치가 있거나 소폭의 방향 전환만으로도 현 정부의 철학에 결합할 수 있는 정책의 경우엔 과감히 계승하는 용기도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잃어버린 10년’을 외치며 무리하게 이전 정권 흔적 지우기에 나서, 결과적으로 갈등만 키우고 자원을 낭비한 보수정권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Anything but Rho’(노무현 대통령의 정책만 아니면 된다)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김대중ㆍ노무현 정부의 흔적 지우기에 몰두했다. 진보 정권의 ‘대못’을 뽑는다며 정치 성향과 무관한 성과마저 부정했다. 2006년 도입된 정부 업무관리시스템인 ‘온-나라시스템’을 무력화한 것이 한 사례다. 이명박 정부는 참여정부에서 개발된 청와대 통합업무관리시스템인 '이지원(e-知園)’을 폐기하고, 이를 ‘위민(爲民)’이라는 시스템으로 교체했다. 이에 따라 전 정권이 혁신 차원에서 활용을 강조했던 온-나라시스템에 대한 장관들의 관심도 시들해졌고, 그 결과 자연스레 활용도도 떨어졌다. 지금도 온-나라시스템에 탑재된 일과표 작성 기능 등은 거의 활용되지 않고 문서 송수신 기능 정도만 사용된다고 한다. 한 경제부처 공무원은 “윗사람이 온-나라시스템을 쓰지 않으니 부하직원들도 쓸 이유가 없어졌다”면서 “공무원 일정을 너무 세세히 밝히게 한 데 대해 반대 여론도 없지 않았지만, 행정 효율성 측면에서 장점도 분명 있었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에선 ‘혁신’이라는 단어도 자취를 감췄다. 참여정부가 청와대에 ‘참여혁신수석’을 두고 각 부처에도 ‘혁신분권담당관실’ ‘혁신인사담당관실’을 설치하는 등 혁신을 브랜드처럼 활용한 것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이명박 정부에서 사라졌던 혁신은 아이러니하게도 박근혜 정부에서 ‘경제혁신 3개년 계획’ ‘창조경제혁신센터’ 등으로 되살아 났다. 이명박 정부에서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낸 박재완 성균관대학교 국정관리대학원 원장은 “노무현 정부 당시 ‘개혁 피로증’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혁신이 남발된 감이 있긴 하지만, 혁신의 취지는 이명박 정부가 계승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 정권 유물로 낙인을 찍어 무작정 폐기하기 보다는, 활용할 여지가 있다면 과감히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박재완 전 장관은 “5년 단임제 하에서 매번 흔적 지우기를 하니 국정의 일관성과 예측가능성이 크게 떨어진다”면서 “전임자의 치적이나 성과를 부정함으로써 현직자를 부각시키려는 유혹을 절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성택 기자 highno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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