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대선은 진보ㆍ보수뿐 아니라
진보끼리 보수끼리도 ‘혈전’
안철수 지지 전인권 향한 ‘적폐가수’
문재인 지지선언 이유로 ‘어용 문인’
심상정 지지하면 사표론 주장에 갈등
“범국민적 지지 개혁정책으로 치유를”
30대 직장인 김모씨는 대선 이튿날 출근길, 뉴스를 훑어보다 울컥했다. 문재인 대통령 선거대책총괄본부장이었던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정계 은퇴를 해야 한다’고 한 기사 때문이었다. 안 후보 지지자인 김씨는 “대한민국 드림팀, 대탕평을 그렇게 강조하더니 당선되자마자 국민 21%가 지지한 후보에게 정계은퇴를 운운하는 모습을 보니 너무 착잡하다”며 “선기 기간에도 SNS에 넘쳐난 조롱과 비아냥 때문에 힘들었는데 점령군처럼 구는 태도에 분노와 모욕감, 환멸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탄핵정국으로 조기 실시된 이번 ‘장미대선’은 파렴치한 국가의 맨 얼굴에 상처받은 유권자들이 각기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욕망의 투사 과정이기도 했다. 추운 겨울 함께 촛불을 들고 광장에 섰지만 꿈꾸었던 나라의 밑그림은 조금씩 달랐다. 그에 따라 지지 후보는 갈렸고, 지지자들은 격하게 부딪혔다. 특히 이번 대선은 5자 구도로 치러지면서, 진보-보수뿐 아니라 진보-진보, 중도-진보, 보수-보수가 싸우며 전선이 뒤엉킨 선거였다. 이제는 바꿔보자는 열망이 절박했고, 절박함은 불안을 낳았으며, 불안은 날 선 언어와 폭력적 행태로 종종 이어졌다. 장미대선의 가시가 남긴 상처들이다.
양념과 적폐, 어용과 줄서기
문재인 대통령이 내세운 선거 캠페인이었던 적폐 청산은 공식 선거운동 초기부터 지지자들이 강하게 맞부딪친 전장이었다. 안 후보를 향해 “적폐세력의 지지를 받는 후보”라고 한 문 대통령의 발언이 ‘다른 후보를 지지하면 적폐세력’이라는 의미로 독해되며 지지자들이 크게 반발했다. 트위터에는 스스로를 적폐로 명명한 냉소적 계정들이 넘쳐났고, 문 대통령 지지자들의 ‘적폐몰이’도 곳곳에서 벌어졌다. 안 후보 지지를 선언한 후 ‘적폐가수’로 몰린 가수 전인권씨가 대표적이다. 문 대통령이 페이스북에 “누구를 지지하든 저는 전인권씨가 우리 국민과 정권교체를 위해 기꺼이 애국가를 불러주는 가수라고 믿는다”고 글을 올리고서야 논란은 잦아들었다.
문 대통령 지지선언을 했다는 이유로 ‘어용 문인’이라는 비판을 받은 작가들도 내상을 입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선이 유력한 대세 후보를 두고 작가들이 집단적으로 지지선언을 하는 것은 문학정신의 타락이자 줄서기라는 비판이 타 후보 지지자들로부터 쏟아졌다. 문학평론가 황현산, 소설가 공지영, 시인 안도현씨 등 유명작가들을 향해 “책을 내다버리겠다”는 언사도 SNS에 횡행했다. ‘치열한 경쟁을 더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양념 같은 것’이라기엔 명백히 위법적이고 폭력적인 가해도 있었다. 안 후보 지지자라는 이유로 임경선 작가는 언어적 성폭력을 겪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책에 식칼이 꽂힌 사진을 받기까지 했다. 자제와 분별, 이성과 상식을 호소하는 목소리들이 가까스로 브레이크를 걸었지만, 보는 이의 영혼까지 파괴하는 깊은 상처로 남았다.
성 소수자ㆍ약자 향한 ‘나중에’
지난달 23일 제 4차 TV토론에서 돌연 터져 나왔던 문 대통령의 ‘동성애 반대’ 발언은 특정 대상을 겨냥해 비수를 던진 것과 다름 없었다. 성 소수자의 존재를 부정한 차별ㆍ혐오 발언이 1, 2위 대선 주자들을 통해 공공연히 발화되면서 혐오의 인증효과가 발생했고, 여론은 폭발했다. SNS에는 “TV 보다 울면서 뛰쳐나왔다”는 성 소수자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공포와 슬픔에 공감하는 이들의 규탄, 반인권적 발언은 문제라고 인정하면서도 당선을 위해 ‘나중에’를 외치는 이들의 갈등, 혐오발언을 무차별적으로 난사하며 문제제기를 진압하려는 극렬 지지자들이 뒤엉켜 일대 혼돈을 이뤘다.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의 장서연 변호사가 무지개 깃발을 들고 기자회견 중인 문 대통령을 향해 걸어가던 기습시위 장면은 한편에선 ‘가슴 무너지는 슬픔’으로, 다른 한편에선 ‘무례한 난동’으로 맞부딪쳤다.
문 대통령은 당선 일성으로 “저를 지지하지 않는 국민도 섬기겠다”는 통합의 메시지를 내놓고 지역과 계층, 여와 야를 가리지 않는 통합 행보를 펼치고 있다. 하지만 “새 대통령이 국민통합이라고 말할 때 그 국민 속에 나는 들어가지 않는 것 같다”는 성소수자들의 슬픈 목소리가 여전히 여론장에 낮게 울리고 있다.
‘정권교체 무임승차’부터 ‘정치 홍대병’까지
심상정 정의당 후보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막판 ‘사표론’으로 심대한 상처를 입었다.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공동 선거대책위원장이 선거 막판 “정의당에 대한 지지는 다음 선거에 하셔도 괜찮다”며 “이번에는 정권교체에 집중해주시는 게 시대정신에 맞지 않나”라고 사표방지론을 공식 제기한 후 심 후보 지지자들은 문 대통령 지지자들로부터 ‘정치 힙스터’ ‘정치 홍대병’이라는 비아냥에 시달렸다. 표는 주지 않으면서 정권교체에 무임승차 한다는 비난까지 나왔다. 마지막 여론조사에서 두 자리 수 지지율을 유지하던 심 후보의 실제 득표율이 6.2%로 낮게 나온 것은 막판 사표론이 먹혀 들었음을 보여주며 지지자들에게 이중의 슬픔을 안겨줬다.
심 후보 지지자인 30대 직장인 박모씨는 “문 캠프는 심 후보가 완주 의사를 밝히고 지지율이 오르자 정의당 지지자들을 끊임없이 후려쳤다”며 “결과만 정권교체면 그 과정에서 파생되는 갈등과 상처는 상관이 없다는 식의 행태에 분노했다”고 말했다.
이번 대선은 선거 기간이 이례적으로 짧아 논쟁과 설득보다 네거티브와 비방전이 승했다. 후보와 지지자들 사이의 심리적 거리가 그 어느 때보다 밀착됐던 선거이기도 했다.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은 이에 대해 “현실에서 자기 욕구나 바람을 실현한 길을 차단당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사회에서는 자기 힘으로 뭘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욕망을 투사하거나 대리만족 하려는 경향이 강해지죠. 특히 우리 사회에는 화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분노를 쏟을 장소를 찾아 배회한다고 느껴질 정도인데, 이번 선거가 그 장을 제공해준 거죠.” 특히 “어느 한 쪽이 확실하게 시대정신을 제시하거나 이슈를 주도하지 못한 선거이다 보니 네거티브 위주로 갔고, 그게 나쁜 영향을 끼친 것 같다”고 말했다.
선거는 끝났고, 이제는 치유의 시간이다. 승자의 오만도 패자의 뒤끝도 모두 멈춰야 할 때다. 김 소장은 “선거가 남긴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려면 국민들 모두가 하나라는 걸 확인시켜 줄 수 있는 확실한 개혁정책이 범국민적 지지 속에 추진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며 “통합하겠다, 지켜봐 달라 같은 말만으로는 치유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통합을 말하기는 쉽다. 남은 것은 그 실천이다.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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