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전문기자가 된 이후 처음으로 본격적인 스포츠카를 시승한 날이었다. 집과 회사를 오가는 시승만으로 차를 반납하고 싶지 않았다. 평소 자동차 전문기자라는 직업을 좀 체 이해하지 못했던 동생을 불러냈다. 물론 자랑할 심산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이 불쑥 튀어나온다. “뭐야, 이렇게 타기 불편하고 좁고 짐 실을 공간도 없는 차는 …” 아, 자동차에 관심이 없는 동승자에게 스포츠카는 그저 비좁고 불편한 차일 뿐이다.
운전자만이 아니라 동승자도 고급 스포츠카의 대명사 ‘페라리’를 한껏 누릴 수 있는 모델이 있다. 바로 장거리 여행을 위한 그랜드 투어러, ‘페라리 GTC4 루쏘’다. 강원도 인제 스피디움 서킷에서 페라리 GTC4 루쏘 T를 시승했다. 먼저 국내에 들어온 GTC4 루쏘의 12기통 엔진 대신 8기통 ‘터보’ 엔진이 들어가 ‘T’가 붙은 모델이다. 페라리마저 과급기를 쓰게 된 이유는 분명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페라리 국내 공식 수입사인 FMK 관계자는 지난 2월 8일 GTC4 루쏘 T의 국내 출시 행사에서 “일상적으로 타면서도 때로는 서킷도 화끈하게 질주할 수 있는 모델을 찾는 수요가 많아 GTC4 루쏘 T를 들여왔다”고 밝힌 바 있다. 그래서일까?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전문가는 페라리 GTC4 루쏘 T의 제품 설명에서도 유난히 ‘실용적’이라는 단어를 거듭 사용했다. 성인 4명이 탈 수 있어 목적에 따라 페라리를 여러 대 살 필요가 없는 전천후 모델이라는 얘기겠지만.
페라리는 GTC4 루쏘 T에 대해 ‘라이프 스타일에 맞춰 도심 속 일상, 주말 여행과 레저 등 다방면으로 활약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넉넉한 뒷좌석과 450ℓ의 트렁크 공간까지 확보했기 때문이다. 앞은 전형적인 페라리지만 뒤는 슈팅브레이크의 실루엣이 배어든 데는 이유가 있었다. 페라리의 말마따나 레저를 즐기는 것까지는 무리일지라도 주말 여행을 위한 그랜드 투어러의 몫은 완벽하게 해낸다.
페라리 GTC 루쏘 T는 단지 실용적인 그랜드 투어러로 그치지 않는다. 뒷좌석은 단지 차종의 특성을 위해 끼워 맞추지 않았다. 사실 문이 두 개뿐이라 뒷좌석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았는데 뒷좌석에 올라탄 순간,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온다. 유리로 덮여있는 탁 트인 선루프는 마치 수족관에 들어온 듯한 신비로운 느낌마저 들 정도다. 뒷좌석 높이를 앞좌석보다 한층 위를 보라는 설계다. 뒷좌석도 버킷 시트같이 몸을 감싸는 형태라서 다리 공간도 충분히 확보됐다. 뒷좌석에 동승한 아시아나 했을 뿐인데도 차의 성능과 움직임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제 직접 운전해 볼 차례. 페라리 GTC4 루쏘 T를 타고 스피디움 서킷 세 바퀴를 달렸다. GTC4 루쏘 T는 최고출력 610마력, 최대토크 77.5kg.m의 성능을 내는 페라리의 최신형 8기통 터보 엔진이 들어갔다. 캘리포니아 T에 들어간 엔진의 보어 길이를 늘려 최고출력을 50마력 끌어 올렸다.
가속 페달을 살며시 밟기만 해도 넘치는 힘으로 불쑥 치고 나간다. 끝까지 가속 페달을 밟지 않았는데,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앞머리가 꿈틀거린다. 시승한 GTC4 루쏘 T에는 피렐리 중에서도 고성능 타이어인 P제로가 끼워져 있었지만, 앞선 시승에서 잔뜩 혹사당한 후였다. 굳이 힘을 다 쓸 필요가 있을까. 서킷 세 바퀴를 도는 내내 단 한 번도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지 않았다. 그럼에도 충분히 빠르고 스릴 넘치는 주행이 가능했다. 스티어링 휠을 거칠고 서툴게 움직여도 안정적으로 빠르게 코너를 돌아나간다. 차의 속도와 스티어링 각도 등을 계산해 차의 미끄러짐을 감지하고, 자세를 유지시켜주는 ‘슬립 사이드 앵글 컨트롤(SSC)’과 상황에 따라 스스로 뒷바퀴의 조향각도를 조절하는 ‘포 휠 스티어링(4WS)’ 덕분이다.
고작 3.9km의 서킷 세 바퀴를 돌아보고 쉽사리 차에 대해 판단할 수는 없지만, GTC4 루쏘 T는 서킷을 신나게 돌기 위한 스포츠카라기 보다 힘 좋은 그랜드 투어러다. 한계까지 몰아붙여가며 최선을 다해 코너를 빠져나가는 것보다 굽이치는 산길이나 해변을 따라 펼쳐지는 도로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움직이는 게 더 잘 어울린다.
운전이 조금 미숙해도 괜찮다.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도 컨트롤 해주고 스티어링이 서툴고 실수가 잦아도 알아서 기가 막히게 자세를 잡아 줘 마치 운전자가 잘하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체면을 세워준다. 기를 쓰고 운전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다만 워낙 힘이 넘치는 강력한 터보 엔진이 탑재되어 있으니, 가속 페달을 밟는 다리 힘은 조절하는 게 좋겠다. 더 빠르게 달릴 수 있지만 굳이 모양 빠지게 그럴 필요가 없다. 부리나케 달리는 게 아니고 성큼성큼 걸어도 이미 충분히 멋지다!
페라리 GTC4 루쏘 T는 필사적으로 코너를 돌아나가며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그런 차가 아니라, 동승자와 함께 우아하지만 강력한 차의 움직임을 느끼며 주행을 즐기기 좋은 그런 차다.
박혜연 기자 heye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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