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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정상에서 맞는 칼바람

입력
2017.05.08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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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황 사회부장 jhchung@hankookilbo.com

어느 대선후보가 자신의 정치적 롤 모델로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을 꼽았다 하니 생각난다. 탁월한 리더십으로 국가 위기를 극복한 이면에 대통령직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2차 세계대전 승리가 임박한 1945년 4월 전후 세계 재건에 골몰하던 루즈벨트가 급사했다. 해리 트루먼 부통령이 백악관에 도착해 루즈벨트 부인 엘리너에게 “당신을 위해 어떤 일을 해드리면 좋을까요”라고 묻자 엘리너의 대꾸가 일품이다. “이제 당신이 골치 아프게 됐다. 내가 당신을 위해 뭘 해주면 좋겠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갑작스런 대통령직 승계를 두고 한 말이다.

19대 대통령선거 투표가 하루 남았고, 이틀 뒤면 새 대통령이 나온다. 헌법재판소 탄핵 결정에 이은 대선 돌입과 대통령직 인수위 가동 등 준비 과정이 없는 상황에서 어수선하고 혼란스런 나라를 떠맡게 된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국가운영의 어려움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국회선진화법 하에서 과반 다수당으로도 국회를 다루기 어려운 판에 5당 체제의 신임 대통령 처지는 산 정상에서 삭풍을 그대로 맞는 격이다. 상대적 차이는 있지만 대선 후보 저마다 통합을 말하는 이유도 이처럼 까다로운 정치 지형과 환경에 있을 터이다.

이 나라는 제왕적 대통령과 입법공화국이 묘하게 엮여 분열과 갈등, 대립의 살얼음판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형국이다. 대통령의 독주만큼이나 국회가 행정부 발목을 잡고, 비난하는 일 또한 손쉽다. 뭔가를 하려 하면 한 가지 이유로도 할 수 있지만, 안 된다고 막아서는 데는 백 가지 이유를 댈 수 있는 게 세상 이치다. 익히 봐왔듯이 정치는 더 그렇다. 그럼에도 비판을 전면에 받는 쪽은 국가운영의 책임을 진 대통령일 수밖에 없다.

루즈벨트가 유례없는 대공황을 극복하고,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로 탄생한 배경으로 다원주의에 기반한 정치 리더십을 꼽는다. 의회와 밀접히 소통하고 타협하면서 적절한 시기가 올 때까지 인내했다는 것이다. 그는 국가기관의 장들을 모아놓고 의회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면서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여러분과 나의 존속이 모두 의회에 달려 있으니 이는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말”이라고 했다. 이런 자세를 가진 루즈벨트도 의회의 재의결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무효 조치를 9차례나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위대한 리더십은 인사 원칙에서 더 빛난다. 뉴딜정책 시행 기관에 정치적 지지자를 중용하지 않아 소속당인 민주당으로부터 불만이 터져 나오는 데 대해 루즈벨트는 이렇게 대응했다. “자격이 된다면 소속 정당을 따지지 않고 기용하고, 자격이 안 되면 동료의원이라도 배제해도 무방하다”고 했다. 당선 후 제 사람 심기에 바쁘고, 업무에 익을 때쯤 진영 도그마에 빠지는 지경이면 통합이든, 타협이 있을 수 없다. 정책보다 더 예민하게 국민의 정서를 건드리고 정권의 성격, 그 앞날을 평가할 수 있는 게 인사 문제다. 비선 실세였던 최순실씨의 인사 개입뿐만 아니라 검찰과 특검에 압수된 ‘안종범 업무수첩’에는 대통령을 만든 사람들의 인사 민원이 적잖이 기재돼 있다. 숱한 비판의 대상이 됐던 박근혜 정부의 낙하산 인사로 봐서 이 또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터다. 차기 대통령마저 국가기관이나 공기업 자리를 ‘대선 승리의 전리품’으로 여기는 한 머지 않아 반 쪽짜리 ‘종이 대통령’이 되기 십상이다.

루즈벨트는 측근에게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뭔가를 원한다”면서 “이게 대통령직을 외로운 자리로 만든다”고 탄식했다고 한다. “대통령 해 먹기 어렵다”거나 “이러려고 대통령 했나”하는 한탄이 나오지 않으려면 국민 다수가 원하는 일, 누구나 바르다고 하는 일을 하면 된다. 대통령 자리도 크게 외롭지는 않을 터이다. 산 정상에서 그대로 맞는 칼 바람이 ‘위대한 정치’의 싹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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