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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별보배고둥

입력
2017.05.0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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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 올라탄다. 빈자리를 찾아 비틀거리며 뒤로 또 뒤로 들어가다 보니, 손을 꼭 잡고 앉아 있는 노부부의 앞자리가 비어 있다. 그냥 지나칠까 망설이다가 그들과 마주보며 앉는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내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나는 어정쩡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녀는 남편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뭐라고 작게 소곤거린다. 나는 무안함을 느끼며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내려야 할 정류장을 놓치지 않으려 신경을 곤두세운 채 바깥 풍경을 주시한다.

지금 나는 먼 나라에 와 있다. 비행기를 타고 열 서너 시간쯤 날아왔다. 운 좋게도, 분에 넘치는 지원을 받아 오랫동안 낯선 곳에 머물 기회가 생긴 것이다. 저 멀리 지붕들 너머 눈 덮인 산봉우리가 보이는 것 말고는, 이곳 자연은 그다지 낯설지 않다. 거리를 걷다가 버드나무를 보았고, 오동나무와 마주쳤다. 길가의 둔덕에서 민들레와 애기똥풀을 발견했다. 신선한 공기, 파란 하늘이 무엇보다 부럽지만, 어쩌면 몇 십 년 전이라면, 우리나라에서도 실컷 누릴 수 있는 것이었으리라.

정수리로 쏟아지는 뜨거운 햇살을 느끼며, 커피숍 탁자에 앉아 사람 구경을 한다. 나는 아직 이곳 사람들과 관광객을 구별하지 못한다. 내 눈에는 그저 모두 유럽 사람들일 뿐이다. 그늘 밑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커피숍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무리를 지어 지나가는 사람들도 모두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거나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린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에 귀를 기울이면서 대화의 내용을 상상해 보고, 웃음의 이유를 추측하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들 사이에 오고 가는 다정함이 부러워 나는 조금 위축된다. 사실은 이렇다. 나는 혼자이고, 그들은 좋은 기운을 나누고 있는 것뿐이다. 낯선 시선 앞에서 쉽게 사랑을 잃어버리는 나의 누추함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본다.

집으로 돌아온다. 아늑하고 볕이 잘 드는 이 집을 나는 인터넷에 있는 숙박 사이트를 통해 얻었다. 집안 곳곳에는 이름 모를 초록색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세어 보니 화분은 모두 일곱 개다. 집주인은 서핑보드를 타고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 얼굴로만 보았다. 그녀는 지금 이탈리아의 사르디니아 섬에 가 있어서, 동네 바의 아름다운 바텐더에게서 열쇠를 건네받아야 했다. 시차 때문에 일찍 깨어난 새벽마다 제법 큰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녀의 책들을 유심히 들여다보곤 한다. 헤세와 폴 오스터 그리고 명상과 요가에 관한 책들. 나는 그녀가 냉장고에 붙여 놓은, ‘인생은 시간이 아니라 깊이의 문제다’ 라는 글귀를 떠올리며 웃는다.

마침내 나는 책장 맨 위에 놓여 있는 그것을 발견한다. 유리처럼 매끄럽고, 물 위로 반쯤 떠오른 고래 등처럼 유선형인, 희고 단단한 조개 껍질. 그것을 본 순간 짙은 그리움이 밀려온다. 그것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책장 위였거나, 거실의 피아노 위였거나, 어쩌면 어머니의 화장대 위였을 수도 있는 곳에 놓여 있었다. 크기도 비슷하고 모양도 똑 같다. 열심히 검색을 해서 그것의 이름을 찾아낸다. 별보배고둥. 그 중에서도 갈색 점박이 무늬가 박혀 있는 것은 타이거별보배고둥이란다. 귀에 갖다 대면 파도 소리가 들린다고, 언니들이 가르쳐 준 바로 그것.

나는 어쩌다가 머나먼 이곳에 와서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듯한 별보배고둥을 만나게 되었을까. 꼬여있는 시간의 마디가, 어지럽고 아득한 신비가 나를 덮치고 있는 중인가. 고둥을 집어 들어 귀에 대 본다. 그러고 있으면 지중해의 푸른 바다 위에서 파도를 타고 있을 집주인 아가씨의 웃음이, 그 인생의 깊이가 나에게 곧장 다가올 것만 같다. 굳게 닫혀 있던 문 하나가 저절로 열릴 것 같기도 하고.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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