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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느리게 가는 섬, 5월엔 청산도에 가야 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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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느리게 가는 섬, 5월엔 청산도에 가야 할 이유

입력
2017.05.05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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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 도청항에서 바라본 노을. 사진 조두현 기자
청산도 도청항에서 바라본 노을. 사진 조두현 기자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에에에,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임권택 감독이 연출한 영화 ‘서편제’ 중반, 구불구불한 시골길에서 주인공 송화(오정해)와 동호(김규철)가 아버지 유봉(김명곤)과 함께 진도아리랑을 구성지게 부르며 내려오는 장면이 나온다. 무려 5분 30초에 달하는 롱테이크 쇼트지만 특유의 흥과 가락에 쉽사리 눈을 뗄 수 없다.

연극 무대처럼 든든한 배경이 된 곳은 전남 완도와 맞닿은 청산도(靑山島)다. 이곳은 이름처럼 푸르른 섬이다. 노란 유채꽃이 만발한 4월이 지나면 청산도는 본래의 녹색 옷으로 갈아입는다. 5월의 햇살은 바다와 섬을 더욱 푸르게 비춘다.

1993년에 개봉한 영화 '서편제'. 위 롱테이크 장면은 청산도 당리에서 촬영됐다
1993년에 개봉한 영화 '서편제'. 위 롱테이크 장면은 청산도 당리에서 촬영됐다

느림은 아름답다

청산도의 시간은 느리게 간다. 완도에서 배를 타고 느릿느릿 50분 정도 파도를 타다 보면 둥근 소라 모양의 청산도가 나온다. 도청항에 내리자마자 달팽이 모양의 조형석상과 함께 ‘느림의 섬, 청산도’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그리고 곧바로 ‘슬로길’이 시작된다. 그 길을 걷다 보면 이상하게 발걸음이 느려진다. 자연법칙을 거슬러 물리적인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게 아니라, 주변 풍경이 발걸음을 느리게 만든다.

도청항에 내리자마자 보이는 ‘느림’의 메시지
도청항에 내리자마자 보이는 ‘느림’의 메시지
청산도 슬로길을 걷다 보면 아름다운 경치에 발걸음이 저절로 느려진다
청산도 슬로길을 걷다 보면 아름다운 경치에 발걸음이 저절로 느려진다

숙소까지 가는 슬로길 제1코스만 걸어도 저절로 발걸음이 멈춰졌다. 그냥 지나치기 아까워 셔터를 연신 눌렀다. 같은 앵글이어도 해가 넘어갈수록 다른 빛을 뿜어내 한 자리에 서서 같은 사진을 얼마나 많이 찍었는지 모른다. 도청항에서 잰걸음으로 10분이면 갈 숙소엔 그렇게 30분이 지나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슬로길 코스마다 친절한 안내판을 볼 수 있다
슬로길 코스마다 친절한 안내판을 볼 수 있다

‘슬로길’은 별도로 만든 게 아니라 기존 마을 주민들이 오가던 길을 코스로 조성해 이름을 붙였다. 마라톤 경기 거리처럼 42.195㎞에 달하는 길은 총 11개 코스로 나뉜다. 2010년 문화체육관광부는 ‘이야기가 있는 생태 탐방로’로 지정했고, 2011년엔 국제슬로시티연맹이 세계 슬로길 1호로 청산도를 선정하기도 했다. 슬로시티는 1999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캠페인으로 느림을 통해 삶의 여유와 높은 질을 추구하는 운동이다. 현재 30개국 225개 도시가 연맹으로 가입됐고, 한국도 청산도를 비롯해 10개의 슬로시티가 참여하고 있다.

걷다가 잠시 쉴 수 있는 벤치가 곳곳에 있다
걷다가 잠시 쉴 수 있는 벤치가 곳곳에 있다

청산도엔 매년 4월마다 ‘느림은 행복이다’를 주제로 슬로걷기축제를 열고 있다. 지난 4월에도 유채꽃과 청보리밭 일대에서 다채로운 프로그램과 함께 축제가 열렸다. 특히 이번 축제엔 청산도가 슬로시티로 지정된 지 10주년을 맞아 청산완보, 슬로길 사랑 나눔 걷기, 범바위 기체조 체험, 청산도 슬로쿡 등 더욱 다양한 즐길 거리가 마련됐다.

‘봄의 왈츠’가 울려 퍼지는 곳

당리에 있는 드라마 '봄의 왈츠' 촬영장
당리에 있는 드라마 '봄의 왈츠' 촬영장

지난 주말 방송된 KBS 2TV ‘해피선데이-1박2일’에선 청산도로 떠난 ‘제1회 단합대회’ 특집의 두 번째 이야기를 담았다. 멤버들은 드라마 ‘봄의 왈츠’ 촬영장인 당리를 찾아 1년 전에 특별 출연한 한효주를 그리워하며 통화해 반가움을 나타냈다. ‘봄의 왈츠’는 2006년 KBS 2TV에서 방영한 드라마로 ‘가을동화’와 ‘겨울연가’로 흥행몰이를 한 윤석호 프로듀서의 작품이다. 한효주는 이 작품에서 여주인공으로 등장했다.

4월의 유채꽃이 지고 나면 섬은 온통 푸른빛으로 갈아 입는다
4월의 유채꽃이 지고 나면 섬은 온통 푸른빛으로 갈아 입는다
한 쪽에 자리한 양귀비꽃들이 푸른 섬에 붉은 포인트를 준다
한 쪽에 자리한 양귀비꽃들이 푸른 섬에 붉은 포인트를 준다

‘봄의 왈츠’ 제작진이 왜 이곳을 로케이션으로 삼았는지는 주위만 둘러봐도 쉽게 알 수 있다. 5월의 청산도는 봄의 끝을 달린다. 채도와 명도만 다른 녹색이 곳곳에서 생명의 에너지를 뿜으며 여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중간에 이름 모를 야생화들은 장식을 더한다. 손에 잡힐 듯한 쪽빛 바다는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후련하게 한다. 충만한 봄의 기운을 받으며 걷기엔 이만한 곳이 없다. 그야말로 봄이 절정에 달한 듯 신명 나게 춤추고 있다.

작지만 푸짐한 섬

청산도는 면적 33.28㎢로 하루면 둘러볼 수 있는 작은 섬이다. 하지만 ‘느린 섬’이다. 기본적으로 품고 있는 풍경이 빼어난 데다 놓치면 아쉬울 만한 명소들이 곳곳에 있어 제대로 보려면 며칠은 걸린다. 그중 호랑이가 웅크린 모습을 닮았다 하여 이름 붙여진 범바위는 예로부터 기가 세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관광객이 ‘센 기운’을 받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바위 사이로 뚫린 구멍을 오가는 바람 소리는 마치 호랑이 울음처럼 앙칼지다.

물 속이 훤히 보일 정도로 맑은 청송지리해변
물 속이 훤히 보일 정도로 맑은 청송지리해변

슬로길의 마지막인 11코스 끝엔 청송지리해변이 기다리고 있다. 이곳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일몰 명소다. 해가 서쪽으로 떨어질 땐 바다에 불이 붙은 듯 화끈하고 아름답다. 2㎞에 달하는 백사장엔 고운 모래가 깔렸고, 수심도 완만하고 얕아 발을 담그고 산책하기에 더할 나위 없다. 백사장 뒤쪽으론 200년 이상 된 노송 500여 그루가 시원한 그늘을 제공한다. 이곳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 시름 따윈 생각나지 않는다.

멀리 보이는 구들장 논과 양식장은 청산도 주민의 주요 생계다
멀리 보이는 구들장 논과 양식장은 청산도 주민의 주요 생계다

청산도엔 돌이 많다. 그래서 ‘구들장 논’이 발달했는데, 산비탈에 구들장을 놓듯 돌을 올려 바닥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부어 논을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흙엔 양분이 모자랐고, 매년 퇴비를 뿌렸다. 쌀이 풍족할 리 없었다. 그래서 과거엔 주로 보리로 죽을 쑤어 먹고 바다에서 잡은 해산물로 끼니를 때웠다고 한다. 구들장 논은 지금도 청산도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청산도엔 해안을 따라 도로가 조성돼 있다. 드라이브도 좋지만, 섬이 크지 않고 곳곳에 볼거리가 많으니 걷거나 자전거 타기를 권한다
청산도엔 해안을 따라 도로가 조성돼 있다. 드라이브도 좋지만, 섬이 크지 않고 곳곳에 볼거리가 많으니 걷거나 자전거 타기를 권한다
도청항에선 자전거를 빌려주기도 한다
도청항에선 자전거를 빌려주기도 한다

슬로길 곳곳엔 1년 뒤에 엽서가 배달되는 ‘느림 우체통’이 마련돼 있고, 청산중학교에서 도청항에 이르는 구불구불 복잡한 ‘미로길’엔 발걸음을 붙잡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그곳을 빠져나와 도청항 뒷골목으로 가면 ‘파시문화거리’가 나타난다. 파시란 풍어기에 열리는 생선 시장으로 청산도는 과거에 고등어와 삼치 파시로 유명했다. 이 밖에 슬로푸드와 조개 공예, 휘리(청산도 전통 그물 고기잡이 방식) 등을 체험할 수도 있다.

완도=조두현 기자 joec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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